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19. 쌍무지개 뜨는 언덕

서 량 2018. 8. 27. 10:41

2018년 여름에 “Three Identical Strangers (세 명의 똑같은 타인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1951년생 세 쌍둥이 형제가 제각기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다가 19살때 필연처럼 우연히 서로를 상봉한다.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긴 타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니. 하나도 아닌 두명의 내가 나를.

 

그들 자신도, 당시의 매스 미디어도, 벅찬 흥분과 감동을 기약하는 시작이었다. 같은 용모에 같은 상표의 담배를 피우고 여자에 대한 취향도 똑같은 그들은 삽시간에 전 미국의 선풍적 인기와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영화는 엄청난 사실을 밝힌다. 그것은 즉 이 생기발랄한 세명의 젊은 청년들이 정신과의사 피터 누바우어(Peter Neubauer, 1913~2008)의 연구 과제였다는 것! 쌍둥이를 대상으로 아동 발육 과정과 정신병에 대한 연구가 성행하던 시대적 배경에 희생된 그들의 상황에 대하여 매스컴은 크게 분노한다.

 

에디, 바비, 데이비드, 셋은 맨해튼에 ‘Triplet’s (세 쌍둥이네)’라는 레스토랑을 같이 시작했고 이내 음식점 경영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는 갈등을 겪는다. 바비는 경영진에서 탈퇴한 후 변호사가 된다. 1995, 에디는 33살 나이에 뉴저지에서 권총자살을 하고, 2000년에 소문난 레스토랑 세 쌍둥이네는 문을 닫는다.

 

현재 바비는 브루클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고 데이비드는 뉴저지에서 보험 에이전트로 일한다. 그들의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반 무도회(prom night)에서 술에 만취해서 섹스를 하고 세 쌍둥이를 낳아 입양을 시킨 후 지금껏 이들의 인생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

 

영화는 ‘nature vs nurture’ 연구에 대한 논란을 조명한다. 이 말을 우리는 본성과 양육, 유전과 환경’, 등등으로 옮긴다. 일란성 쌍둥이 셋 중에 왜 하나는 변호사가 되고, 하나는 보험 일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자살을 했는가 하는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이분법적 논란이다.

 

‘nature’자연이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 라틴어로 태어나다는 뜻이었고 ‘nurture’양육하다라는 말로서 ‘nurse, 보살피다와 어원이 같다. 유전과 환경은 카페 올레(café au lait) 같은 하나의 혼합체로 우리를 지배한다.         

 

영화감독 팀 워들(Tim Wardle)는 한 인터뷰에서 바비와 데이빗이 촬영 내내 서로 얼음장처럼 차가운(frosty)” 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 세 쌍둥이들은 매스컴의 열기에 휩쓸려 공동으로 음식점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체주의의 위험성은 국가뿐만 아니라 쌍둥이들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굳이 한 개인의 존엄성에 귀의하지 않더라도 나의 정체성은 이 세상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뚜렷한 내용과 윤곽을 지속하고자 한다. 그 유일무이한 속성은 타인과의 아낌없는 공유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나와 내 쌍둥이는 신성불가침한 개별성의 보호막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 평온한 성역(聖域)을 침범하는 나의 복제품을 향하여 심하게 반발한다.


소년 잡지 '학원'에 검은 별을 연재했던 김내성(1909~1957)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기억한다. 부유한 환경에서 커온 영란은 가난한 집에서 자라 저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일란성 쌍둥이 은주를 질투한다. 쌍무지개는 두 쌍둥이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이야기는 돈암동 언덕에 쌍무지개가 뜨면서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Three Identical Strangers’해피 비기닝에서 그친 다큐멘터리였다.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점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으로 진땀이 나는 2018년 막바지 여름이다.

 

©서 량 2018.08.26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8월 29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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