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병동에서 그룹 치료를 하다가 환자들에게 투덜댔다.
내 불평은 이랬다. –- 너희들은 내가 분노에 대하여 언급을 하면 금방 화를 내고, 우울증에 대하여 토론을 하면 이내 풀이 죽어서 우울한 표정이 되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느냐? 분노나 우울증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고 어쩌자고 너희들은 분노나 우울증 자체를 내게 고스란히 쏟아내느냐?
섹스에 대하여 토의를 할 때, 섹스에 대한 자기의 체험이나 의견을 말하지 않고 난데없이 몸으로 섹스를 표현한다면 이만저만 난처한 노릇이 아니다. 분노도, 우울증도, 섹스도, 하나의 화제(話題), 하나의 토픽(topic)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 모양새다. 생각은 생각이고 행동은 행동이라는 분별력 대신에 ‘생각=행동’이라는 공식이 그들을 형편없이 지배하는 것이다.
분노에서 출발하는 공격성과 섹스에서 일어나는 성적인 행동은 사회적인 터부(taboo), 금기의식 때문에 누구나 애써 억제한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없어지지. 그러나 우울한 마음이 자아내는 슬픔의 적나라한 표현에 대하여 당신과 나는 깊은 동정심을 품고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남북 가족상봉에서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을 부둥켜안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주름진 어미의 얼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자신의 정서를 이해하는 첫 단계는 스스로의 감정을 관찰하는 습관이다. 때에 따라서 용기도 있어야 해요. 이때 자기 감정을 관찰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어떤 감정에도 크게 압도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 북받치는 슬픔의 자초지종을 찬찬이 설명하지 못하고 퍼질러 앉아 엉엉 울기만 하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원초적 감성의 배설과 인간적인 감정의 흐름을 조용히 관찰하는 지성의 차이점에 대하여 생각해보라.
사람의 감정은 비언어(非言語)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동물에 가깝지만 정교한 언어는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지적(知的) 도구다. 당신이 벅찬 감정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자신의 비언어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감정과 알맞은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도 감정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생각이 곧 행동이 아니듯이 화제(topic)가 곧 현실이 아니라는 각성도 감정과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topic’은 17세기에 라틴어와 희랍어로 ‘장소, 같은 지역’이라는 뜻이었다가 18세기에 ‘화제, 이야깃거리’라는 의미가 됐다. 그 옛날에 서구인들이 수다를 떨고 가십(gossip)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같은 지역 사람들이라는 데 있었다. 먼 옛날 신라 사람들은 신라 사람들끼리 백제 사람들은 백제 사람들끼리 화제를 나누었고 아직도 그런 지역감정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슬픔이 화제가 됐을 때 공감하고 동조하는 측은지심이 있다. 분노 혹은 남녀의 정념(情念)을 포함한 모든 인간 감정은 다 전염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남 사이, 즉 주체와 객체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사태가 나와 나 사이, 다시 말해서 주체와 주체 사이에 연신 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내 감정에 심하게 압도당하거나 빠져서 감정의 노예가 되는 일을 시쳇말로 ‘자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날 내가 한참 투덜댔던 병동의 그룹 치료 환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네들 감정에 진탕 빠져 에헤야 디야, 스스로에게 공감하고 동조했던 것이다. 참고로, 인터넷 네이버 사전에 ‘자뻑’이 이렇게 나와 있더라. -- 한자, 스스로 자(自)와 강렬한 자극으로 정신을 못 차린다는 의미의 속어인 ‘뻑’이 합성된 신조어.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정신을 못 차린다, 제 정신이 아니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 서 량 2018. 08.12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8월 15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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