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09. 응?!

서 량 2018. 4. 2. 09:40

한자어, 응급(應急)을 옥편에서 찾아보았다. '응할 응', '급할 급'. 사전이 어떤 말을 풀이하려고 그 말 자체를 다시 점잖게 되풀이할 때 나는 잠시 주춤한다. 시(詩)를 '시 시'라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 한자어 없이 당최 무슨 말을 풀이할 수 있을까.


응할 應자를 살펴본다. 이 형성문자의 처음 세 획은 '집 엄'으로 집 또는 암자를 뜻하고, 그 속은 사람이 매를 꼭 잡고 있는 모습이라 이른다. 용마루와 지붕 아래로 사방이 막혀서 답답한 미음(ㅁ)자의 두 변두리가 시원하게 열려 있다. 그 밑에 마음 心이 자리를 잡는다. 


應이 암시하는 상호작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매, 더 자세히 말해서 사냥에 쓰이기 위하여 길들었기 때문에 사람의 집을 제집처럼 활개치며 들락거리는, 그런 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이다. 인간과 조류(鳥類) 사이에 일어나는 오묘한 교감작용이다.


이 형성문자 속에서 사람과 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둘 사이에 입에 침을 튀기는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얼른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잘 길든 습관에 의하여 상대의 마음을 읽는 무언(無言)의 소통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 결과로서 應의 뜻은 “응하다, 대답하다, 맞장구치다, 승낙하다, 화답하다” 같은 말로 열거된다.


應이 보여주는 사냥꾼과 매는 쌍방이 같은 목적의식이 있다는 점을 당신은 부러워할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순과 혼란, 그리고 경제적 경쟁과 계급적 투쟁의식에 허덕이는 현대인으로서는 아스라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상이 아닐 수 없다. 


급할 急 또한 아래쪽에 마음 心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위에 있는 다섯 획은 '미칠 급(及)'에서 생겨났으며 남을 쫓아 따라가는 모양이라고 사전은 풀이한다. 말이 쉽지! 남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쫓아가는 마음처럼 조급한 사람 마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때 '미치다'는 내 환자들처럼 정신적으로 미쳤다는 말이 아니고 어디에 도달하다, 이르다, 또는 닿는다는 뜻이다.


'응'자도 '급'자도 다 마음 心자가 들어갔지만, 급할 急자 때문에 위급한 정신상태에 빠지는 단어가 응급(應急)이라는 단어다. 어깨에 앉은 날카로운 눈매의 매를 파트너 삼아 유유히 걸어가는 동양의 사냥꾼이 시사하는 여유로움은 홀연히 사라지고 초조한 마음만 거듭 크게 클로즈업되는 현대의 응급실이다. 


'emergency(응급)'는 어둠 같은 데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의 동사 'emerge'의 명사형. 16세기 중반에 라틴어와 불어에 생겨난 말로써 현대어로 기업의 합병이라는 뜻의 동사, 'merge' 앞에 '밖으로'라는 뜻의 'e'가 붙은 말이다. 'emergency'에는 나타난다는 뜻이 있을 뿐 급하다는 뉘앙스는 전혀 없다.


'ambulance'를 우리는 구급차(救急車)라 부른다. 18세기에 '이동식 병원' 그리고 나중에 '야전 병원'이라는 뜻에서 변한 이 말 또한 급하다는 의미가 들어설 틈이 없다.


어원학적 차원에서 이런 질문이 나온다. 왜 성미 급하고 괄괄한 서구인들의 응급실 정서에는 조급한 기색이 안 보이는가.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노닐던 고대의 중국인들이 현대의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마음이 화급해지는 것은 왜일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서양의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이 반대로 바뀐 것은 아닐까.


친한 사이에 쓰이는 말, '응'의 어원을 밝혀낸 느낌이 든다. 그 '응'은 앞서 말했듯이 “응하다, 대답하다, 맞장구치다, 승낙하다, 화답하다”라는 뜻의 한자어 '응할 應'에서 유래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최초로 주장하는 학설인 듯싶은데.

 

ⓒ 서 량 2018.04.01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4월 4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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