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리카(Costa Rica)에 4박5일 관광여행을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뿌라비다(Pura vida)'라는 스페인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안내자가 그 말은 영어로 'Pure life (순수한 인생)'라면서 'Wonderful life (신나는 인생)', 'Great life (즐거운 인생)' 식으로 풀이한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남한 반 정도 크기의 가난한 나라 코스타리카가 전세계 국가중 행복지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니!
인생, 인생, 하니까 무슨 난처한 일이 터졌을 때 프랑스어로 셀라비!(C'est la vie!) 하는 관용어가 떠오른다.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인생이란 워낙 그런 거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라, 하며 마음을 달래는 이 말을 미국인들도 자주 쓴다.
프랑스는 거리에서 자주 개똥이 발에 밟히고 도시가 더럽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뜬다. 코스타리카는 사시사철 기온이 따스하고 맑은 하늘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서 늘 물에 씻은 듯 정갈하다. 프랑스인들의 예민성과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낙천성의 차이점이 환경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짧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무차스 그라시아스 (Muchas gracias, 대단히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중 얼떨결에 'Thank you'가 튀어나온다.
'gracias'는 영어 'grace (우아함, 품위, 은총)'의 복수형. 상대를 칭찬하고 축복해주는 감성적 표현이 쾌적하다. 똑같이 라틴어에 뿌리를 둔 이탈리아어는 'grazie'라 하지. 프랑스어로는 'merci'. 이 말은 영어의 'mercy (자비)'와 말뿌리가 같고 '셀라비'처럼 불교적 향기를 슬쩍 풍긴다.
'thank(고마워하다)'는 고대영어 'think(생각하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독일어의 고맙다는 'danke'가 생각한다는 뜻의 'denken'에서 파생했듯이. 짧게 말해서 고마운 마음을 라틴계 사람들은 은총! 하며 외치고, 프랑스인들은 자비! 하며 중얼거리고, 영국과 미국과 독일 사람들은 생각! 하며 읊조리는 것이다. 은총이나 자비를 소망하는 감성보다 생각을 추구하는 태도에 비종교적 안목과 지적인 차가움이 엿보인다.
고맙다는 일본말 '아리가또'를 당신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아리가또'는 원래 '세상 살기 힘들다'(有難)는 뜻이었단다. 중세 이후 일본에 불교 문화가 퍼지면서 '힘든 세상에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며 지루하게 말하다가 나중에는 '힘든 세상!'이라고 첫 부분만 말하기에 이르렀다는 글을 읽었다.
중국인들이 고마워할 때 '쎼쎼(謝謝)'하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사례할 사'의 연속! '謝'는 '말씀 언' 변에 사살(射殺), 사정(射精)할 때 쓰이는 '쏠 사'가 합쳐진 단어다. 그들은 고마운 상대에게 말(言)을 총 쏘듯이 쏴대는 모양이지.
고맙다는 순수한 우리말의 어원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다가 얻어낸 결과를 소개한다. <역사와 어원으로 찾아가는 우리 땅 이야기>(2015)를 출간한 최재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어머니 웅녀(熊女)를 이야기한다. 웅녀는 마늘과 쑥으로 100일 동안 굴속에서 시련을 견딘 매우 참을성 있는 곰으로써 모계 위주의 농경사회에서 신성하고 높은 존재로 군림한다. 사람답다, 꽃답다처럼 어떤 성질이나 특성을 뜻하는 접미사 '~답다'가 곰 끝에 붙어서 '곰답다', 했다가 '고맙다'로 변했다는 최재용의 변론에 공감이 간다.
관광여행을 마치고 이제 다시금 뉴욕의 을씨년스러운 하늘 아래다. 뿌라비다의 순간들이, 은총과 자비로움의 청명한 햇살이 쏜살처럼 뇌리를 스친다. 아득한 옛날 태백산 신단수에 서성이던 우리의 곰다운 어머니 웅녀를 생각하며 고마워하고 있다, 지금 나는.
ⓒ 서 량 2018.03.05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3월 7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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