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에 한 정신과의사가 티비 뉴스 프로에서 우울증에 대하여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새로 개발된 약을 추천하면서 그 약이 우울증 외에도 불안증세가 있으면 그것 마저 곁들여서 잘 처리해준다고 언급한다. 그 순간 셰익스피어가 햄릿 입을 통해서 한 말,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이상스럽게 연상하면서 움찔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그 유명한 구절을 나는 그때 굳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고 직역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있다, 없다' 하는 흑백논리를 추구하는 그 유능해 뵈는 백인의사에게 거부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람 마음이란 이를테면 한 여자가 임신이다, 아니다 할 때처럼 우울증이다, 아니다, 하며 단지 존재여부만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부턴가 내 환자들을 명사로 보는 대신 동사로 보는 습관이 생겼다. 한 사람이 불안장애(anxiety disorder)라는 명사가 아니라, 어떤 사연이나 내막 때문에 불안하게 느끼는(feeling anxious) 지경에 들어갔다는 견해를 옹호한다. 불안장애는 그 증상을 약으로 제거해주면 된다는 단순한 이론이 적용될 수 있지만 나나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느 사람에게 어찌하여 그런 상태가 발생했는지 자초지종을 알고 싶은 것이다.
명사가 사진이라면 동사는 동영상이다. 사진은 공룡의 화석처럼 영원한 침묵 속에 갇혀 있을 뿐 동영상처럼 역동적인(dynamic) 생명력으로 보는 사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명사가 고리타분한 속박이라면 동사는 줄기찬 자유다.
영어의 동사는 말의 시작에서 확 터지지만 우리말의 동사는 문장의 끝에 슬며시 붙는다. 'I think so' 할 때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첫마디에서 당당하게 밝히지만 '저는 그렇게...'라고 우선 말해 놓은 다음 '생각합니다' 혹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며 상대의 눈치를 보면서 막판에 가서야 생각을 결정하는 은근하고 소심한 본성을 들어내는 우리들이다. 영어는 첫마디만 듣고 나머지는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말은 참을성을 가지고 끝까지 들어야 한다. 서구적 언어감각은 행동을 위주로 하는 반면 동양적 언어구조는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는 명상적 의식구조와 망설임에 안주한다.
사람의 언어발달 과정에서 동사와 명사 둘 중 어느 품사를 먼저 택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전인도 유럽어에서 'verb(동사)'에 해당하는 단어는 '말하다'라는 뜻이었고 'noun(명사)'에 해당하는 것은 발음도 비슷한 현대영어의 'name' 즉 '이름'이라는 의미였다. 입으로 소리를 내는 행동이 언어의 시발점이라면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도 사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언어활동은 한참 후에 습득한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류의 조상은 아마도 동사를 먼저 사용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와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 또한 흥미롭다. 예컨대 "그는 그녀를 만났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는 눈매 고운 그녀를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라 한다면, 그녀라는 인칭대명사를 꾸며주는 형용사구, '눈매 고운'이며 만난다는 동사를 부풀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라는 부사절 때문에 두 남녀의 정황이 더욱더 알뜰살뜰하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정신과 환자는 엑스레이 사진 같은 붙박이 현상이 아니다. 그들은 제거되거나 처리 당하는 증상이라기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칙대로 출몰하는 변화무쌍한 동력이다. 아프고 애달픈 감성을 형용사와 부사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역동적인 보살핌과 설득을 필요로 하는 불우한 사람들이다.
© 서 량 2018.01.07
-- 뉴욕중앙일보 2018년 1월 10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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