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티비 드라마는 악역에 시청률의 운명이 딸렸다 한다. 악한(惡漢)이 어떻게 주인공을 괴롭히냐에 따라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주인공 남녀를 열렬히 응원하는 당신과 나다. 요새는 악녀(惡女)의 역할이 가장 인기란다.
악한이 여럿일 경우도 많다. 그럴 때는 악당(惡黨)이라 부른다. 우리의 씩씩한 남자 주인공이 이단 옆차기며 돌려차기로 몸을 날려 음산한 골목길에서 깡패 여럿을 죄다 쓰러뜨린다.
악당 두목은 아주 점잖거나 유머러스할 수도 있는데 까딱 잘못하면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다. 그러나 대개 악인들은 이기적이고 교활하고 끝까지 반성할 줄 모르는 특징을 지닌다.
판소리 심청전에서 악역을 맡은 뺑덕어멈을 묘사하는 구절이 다음과 같다. (뺑덕어멈은) "... 고기 잘 먹고 술 잘 먹고, 시원한 정자 밑에서 웃통 벗고 낮잠 자고, 여자 보면 내외하고 남자 보면 쌩긋 웃고, 코 큰 총각을 유인하여 밤낮으로 거시기 하고..." 이런 묘사를 보고 당신은 크게 분노하기보다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저도 모르게 터질지도 몰라요.
판소리 흥부전에서 놀부에 대한 표현은 이렇다. 해부학적으로 오장육부 대신에 왼쪽 갈비뼈 아래에 조그만 심술 주머니가 하나 더 달렸다고 해서 오장칠부라 불렸던 그는 심술이 나면 이런 짓들을 했다. "... 불 난데 부채질, 호박에 말뚝 박고, 똥 누는 놈 주저앉히고, 우는 어린애 똥 먹이고, 애 밴 부인네 배 차고, 달리는 놈 다리 걸고, 이 앓는 놈 뺨 때리고..."
미국 만화 '슈퍼맨(Superman)'에 나오는 'Lex Luthor'의 악역도 유머러스한 데가 많다. 그리고 '배트맨(Batman)'에 등장하는 'Joker'며 결코 당신이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Penguin'도 잔인한 해학으로 스토리 진행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다.
악한을 영어로 'villain'이라 한다. 이 이상한 단어는 13세기에 고대불어에서 생긴 말로서 원래 출신이 비천한 '촌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황당한 어원이다. 촌사람들이 악당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오는가.
'빌라(villa, 별장)'도 악한이라는 뜻의 'villain'과 말뿌리를 같이한다. 'villa'는 17세기에 들어서서 로마인들이 즐겨 찾던 시골 별장을 뜻했다. 이 어원학에 따르면 요새 한국에서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악당들이다.
'village (마을)'도 'villain'이며 'villa'과 말뿌리가 같다. 이 세 단어는 하나같이 우리 한글로는 표시가 불가능한 소위 '브이' 발음. 다시 말하면 이렇다. 악당 = 촌사람 = 별장에 사는 사람 = 마을 주민
1996년에 힐러리 클린튼(Hillary Clinton)이 쓴 책, 'It takes a village.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이 필요하다'에 대한 언급도 해야겠다. 어원학적 차원에서는 한 아이를 악당들이 키워야 된다는 이론이 참 수상하다.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공화당의 'Bob Dole'은 이런 말을 했다. "... with all due respect, I am here to tell you, it does not take a village to raise a child. It takes a family to raise a child. -- 죄송하지만,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이 아니라 한 가정이 필요하다고, 저는 여기서 말씀 드립니다."
당신도 양심이 있으면 눈을 감고 한 번 생각해 보라. 소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촌무지렁이를 악한으로 취급하는 서구적인 의식구조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런 악한이 행패를 부려야만 당신이 손에 땀을 쥐면서 주인공 남녀가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은 또 무엇인지를.
© 서 량 2017.04.30
-- 뉴욕중앙일보 2017년 5월 3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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