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당신은 아마 'Familiarity breeds contempt, 친숙은 경멸의 근본'이라는 영어 격언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서로간에 익숙해지면 상대를 깔보게 된다는 뜻이다.
가까이 지내는 형제 자매들끼리 툭하면 싸우거나, 손주 귀엽다고, 오냐오냐 했더니 할아버지 무르팍에 똥싼다는 우리 속담도 다 같은 말이다. 불상사는 늘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난다.
논리의 비약을 하자면 이 격언은 기원전 44년에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가 가장 믿었던 친구 브루트스에게 배신을 당한 나머지 급기야는 그의 칼에 참혹하게 찔려 숨을 거두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각설하고, 근래에 우리 말에 '개'가 들어가는 신조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본다. 개나리, 개꿈, 개살구, 개망초, 개망신 같은 말은 이미 표준어에 속하는 말이지. 그러나 '개심심하다', '개피곤하다', 그리고 '개좋아', '개웃겨', 심지어는 '개섹시', '개대박!' 같은 이상한 말들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이런 표현들 중에 일찌감치 개피곤하다는 뜻으로 영어에도 문자 그대로 'dog-tired'라는 똑같은 말이 있는 것도 신기하다. 감기몸살 따위로 몸이 아파 쩔쩔매는 상태에서 'I am as sick as a dog'라 한다. 이걸 '개아프다'라고 번역하면 혹시 당신이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몰라.
개는 인간과 가장 오랜 동안을 가깝고 친숙하게 지내온 동물이다. 개처럼 사람에게 충실한 동물은 세상에 또 없다. 그리고 개는 고양이처럼 도도하지 않아서 좋다. 항상 꼬리를 흔들면서 동물적 충정과 사랑을 당신과 내게 호소하는 개! 우리는 가깝게 지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언제부턴가 개를 경멸하기 시작한 거다. 꽤 오래 전부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신이 상대를 모욕하고 싶을 때 가장 효과적인 표현은 '개'가 들어가는 것이 좋다. 참고로 개자식, 개새끼, 개년, 개좆 같은 놈, 같은 말들이 길바닥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비속어.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처럼 개를 다양하게 일상어에 등장시키지 않는다. 단지 남자를 향하여 내뱉듯이 하는 '암캐의 아들' 라는 호칭이 최악의 경우다. 'Son of a bitch!'는 영어권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다.
'No man is a hero to his valet, 어떤 영웅도 몸종에게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영어 속담도 한번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상대를 한껏 뱃속에 넣고 싶은 우리들! 한여름에 개장국을 먹고 이쑤시개로 잇몸을 쑤시면서 소문난 보신탕 집 골목을 슬금슬금 걸어 나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일이라고 할까.
'개소주'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현대판 엉터리 개소주는 개장국에 소주를 넣어 국물이 게슴츠레한 보신탕을 일컫는데 요즘은 거기에 비아그라를 몰래 넣는다는 소문조차 파다하다.
우리 조상들은 '향육' (香肉,개고기)에 한약재를 섞어 다릴 때 올라오는 수증기의 맑고 투명한 액체를 받아 먹었다. 개고기를 향기로운 고기라 부르는 그들의 발상 또한 개웃기는 지혜다. 개소주는 개의 순수한 엑기스와 한약의 합성물이다. 실내에서도 갓을 쓰던 점잖은 우리의 선조들이 개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 때문이었단다. 중국인들이 우리보다 개고기를 먼저 먹기 시작한 것이다.
딴 소리를 해서 미안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얻은 결론인즉, 우리가 세상에 증정할 수 있는 것이란 개고기를 먹는 몸보신이 아니라 개를 향한 절실한 동정심과 고마움이라는 것! 단지 친숙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개를 경멸의 대상으로 삼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개아프게 느끼는 2016년 연말이다.
© 서 량 2016.12.25
-- 뉴욕중앙일보 2016년 12월 2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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