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68. 아픔과 고픔

서 량 2016. 9. 6. 06:12

얼마 전 양키친구와 'pain' 'ache'의 차이점에 대하여 농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chest pain, 흉통'처럼 'pain'이 급격한 아픔이라면, 'muscle ache, 근육통처럼 'ache'는 느리면서 무지근한 아픔이라는 점에 대하여 우리는 점잖게 의견을 모은다.

 

내가 말하기를, 허리가 날카롭게 아플 때는 'back pain'이라 하고, 둔하게 아플 때는 'back ache'라 하지만, 성가시고 골치 아픈 사람을 모욕하고 싶으면 'pain in the ass, 급격한 엉덩이 아픔'라는 걸쭉한 관용어를 쓸 일이지 절대 'ache in the ass, 무지근한 엉덩이 아픔'라 하면 안 된다! 그 친구 왈, 저는 변비가 심할 때처럼 의사소통이 묵직하고 답답한 사람을 'ache in the ass'라 부른다며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둘 다 킬킬대고 웃는다.

 

한자어, 통증(痛症)이나 순수한 우리말 '아픔'은 영어처럼 날카롭거나 둔한 감각을 분별해 가면서까지 굳이 다른 단어를 쓰지 않는다. 아픔에 대하여 서구인들은 분석적이지만 동양인들은 총괄적이고 대범하다.

 

'pain' 13세기 후반 고대 불어와 라틴어의 형벌이라는 뜻에서 시작된 단어. 사람이 벌을 받으려면 역시 체벌을 받아서 따끔한 아픔을 느껴야 된다는 교훈이 숨어있다. 'No pain, no gain. -- 고통이 없으면 얻지 못한다'는 뼈아픈 격언도 있지 않은가?

 

'ache'는 원래 시련을 겪는다는 추상적인 뜻으로서 'pain'과 다른 차원이다. 이 말은 또 'awe (경외감)'이라는 단어와 말뿌리가 같다. 심지어 'awful, 끔찍한', 그리고 'awesome (훌륭하다는 의미의 근래 영어 유행어), 어마어마한, 쌈박한' 같은 단어 또한 'ache'와 같은 뿌리다. 쌈박함 속에 뻐근한 아픔이 깔려있어요.

 

'ache'를 동사로 쓸 경우에는 무엇이 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한다는 강한 욕망을 표출한다. 'I am aching to see her. -- 나는 그녀를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

 

이제 당신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열거하는 다음 말들의 공통점에 대하여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주의를 집중해 줬으면 하는데. --- 아프다, 슬프다, 구슬프다, 서글프다, 애달프다, 고달프다, 가냘프다, 어설프다, 헤프다, 가고프다, 보고프다, 먹고프다, 하고프다, 그리고, 배고프다!

 

어문연구학회의 정윤자가 2004년에 발표한 '싶다' '-고프다'의 재구조화 과정의 고찰이라는 논문을 읽었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국어사 자료를 살펴본 그녀의 결론이 참 쌈박하다.

 

'싶다' 15세기의 "식브다" 16세기에 ''이 탈락되어 "시브다", 그리고 17세기에 '' ''로 돼서 "시프다"가 된 것. 19세기에 드디어 "시프다" '싶다'로 변했다.

 

'싶다'의 뜻을 사전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 또한 배웠다. 1. 욕구 (당장 가고 싶다) 2. 가능성 (비가 올 듯 싶다) 3. 두려움 (누가 볼까 싶어 민망하다)

 

앞서 말했듯이 'ache''견딜 수 없는' 서구적 욕구에는 묵직한 아픔이 넘쳐흐르고 무엇을 하고 '싶다'할 때 우리의 욕구는 두려움이 비빔밥처럼 뒤범벅으로 섞인다.

 

'아프다'는 앓을 듯 싶은 두려움 투성이 '앓프다'''이 없어진 말. '배고프다'는 배를 쫄쫄 곯을 듯 싶은 두려움이 담겨진 '배곯프다'''이 없어진 말. 이것이 바로 정윤자와 내 학설이다.

 

몸이 아픈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아픔과 배고픔 그 자체라기보다 두 가지의 인간조건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고 하면 더 진실에 가까운 말일지도 모르겠다.

 


© 서 량 2016.09.05

-- 뉴욕중앙일보 2016년 9월 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