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54. 혼동과 끌림

서 량 2016. 2. 22. 07:20

일본이 과거에 우리에게 저지른 괘씸한 행적을 상기시키는 '위안부 소녀상''comfort woman statue'라 옮겨놓은 영문기사를 읽고 잠시 생각한다. 이 영어에는 '소녀'라는 말이 빠져있다.

 

'comfort woman statue'를 다시 역으로 번역하면 '위안부상'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 소녀상'을 원본에 충실하게 'comfort woman girl statue'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영어가 구질구질하고 설명적으로 되는 바람에 짤막한 우리말이 풍기는 여운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위안부'는 성인여성 상태를 전제로 하고 '소녀'는 여자가 미성년자임을 암시한다. 이렇듯 '위안부 소녀상'이라는 말에는 이율배반적 이미지가 합쳐진 애절함이 도사리고 있다. 그 슬픔이란 상호 모순적인 인간감정이 불러일으키는 혼동의 아픔이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com-' 혹은 'con-'은 함께라는 뜻이라고 나는 자주 지적한다. 그래서 이 접두사는 여럿이 함께 사는 지역사회, 'community ', 그리고 여럿이서 함께 나쁜 짓을 꾀하는 음모, 'conspiracy' 같은 단어의 첫 음절이 된다. 심지어는 'm' 'n'도 없애버리고 공동서명을 'cosign', 공존한다는 말을 'coexist'라 하는 것도 재미있다.

 

우리가 무심코 '위안'이라 번역하는 'comfort'의 후반부, 'fort'는 뉴욕지역에서 사는 한국사람들이 너나할것없이 다 알고 있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에서 차로 5분 상관 거리 한인 밀집 타운 'Fort Lee'의 바로 그 'fort'.

 

'fort'는 보루, 요새, 진지라는 뜻으로 15세기 중엽부터 쓰인 라틴어로서 강하고 힘이 세다는 뜻이다. 어원학적 분석에 의하면 'comfort'는 누구와 함께 힘을 합친다는 의미가 된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우리의 옛날 한국 소녀들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강점기의 일본 놈들 힘을 북돋아줬다니? 혼동의 강도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혼동', 'confusion'을 어원학적으로 분석하면 아주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문자 그대로라면 '함께 섞다, 함께 합치다'라는 뜻인데 왜 헷갈린다는 의미가 됐을까.

 

혼동(混同)을 옥편은 '섞을 혼' '한가지 동'이라 풀이한다. 차제에 당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각할지어다. 우리가 무엇이 헷갈린다는 것은 같은 것들끼리 섞였을 때 일어나는 정신상태라는 것을.

 

나도 정신을 바짝 차린다. 내 나이 열 살도 채 못됐을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하던 노래가 떠오른다. 통일이란 같은 민족끼리 함께 합친다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 아니던가. 그러나 '통일=혼동'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을 어찌할까나.

 

극과 극이 상통한다더니. 같은 것들끼리 합치면 혼동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다른 것들은 서로를 지남철처럼 끌어당긴다는 사실은 어쩌면 좋은가? 이것은 실로 음양설의 기반을 이루는 이론이다.

 

'attract'는 끌어당긴다는 뜻. 16세기 중엽 서구인들이 찜질로 쓰던 약초가 신체의 염증 때문에 생긴 체액을 흡수하는 과정을 묘사한 말로서 엄청나게 의학적인 관찰에서 태어난 말이다. 나중에 이성간 매력을 느낀다뜻이 됐지만 요컨대 우리 선남선녀들은 찜질이 문제다.

 

동질성이 혼동을 일으키는 반면 이질적인 성향은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영문이냐? 하다가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래 전부터 자주 쓰는 말, '친()'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정답을 찾아낸 아찔한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다른 것들끼리 끌리는 이유는 같은 것들이 섞일 때 일어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다! 하면 억지겠지? -- 정신과에는 늘 이런 혼동이 있다.

 

© 서 량 2016.02.21

-- 뉴욕중앙일보 2016년 2월 24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