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51. 세 번째 굴욕

서 량 2016. 1. 11. 05:35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1925년에 '정신분석에의 저항'이라는 논문에서 인류의 극심한 자애심(自愛心)이 역사적으로 세 번의 굴욕을 당했다고 지적한다. '자애'를 요즘 유행하는 시쳇말로 '자뻑'이라 해도 당신은 크게 반발하지 않겠지?

 

첫 번째 굴욕은 16세기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점잖게 버티고 앉아있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태양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는 깨달음은 인류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었다. 둘째는 19세기에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에서 사람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원숭이의 자손이라 했던 신성모독적인 발언. 셋째로는 20세기 초에 우리 모두가 '리비도'라는 성애(性愛, sexual love)에 의하여 동물본능으로 살고 있다는 자신의 학설이었다.

 

이 굴욕적인 세 가지 발견으로 입때껏 고상한 줄로만 알았던 당신과 나의 신성한 자뻑상태가 묵사발이 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신을 해파리처럼 문적문적하게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요령이 있다. 첫째, 사물의 진면목을 인정사정 없이 까발려서 수치심을 야기시키는 방법. 둘째는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법. 전자가 위선이 들통나는 낯뜨거움이라면 후자는 당신과 내가 배우지 못해서 '쪽 팔리게' 당하는 경우다.

 

나는 의학적 견지에서라도 사람이 동물왕국에 속하기 때문에 매우 동물적이라는 견해를 쉽사리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느끼는 뻐근한 굴욕은 그것보다 다음과 같은 프로이트의 큰 교훈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과거 어릴 적에 아버지 같은 중요인물을 향하여 품었던 감정이 현재의 직장상사라는 애먼 사람에게 고스란히 옮겨지는 경험을 대서특필한다. 요컨대 정신과의사는 은연중 한 환자에게 부모 중 어느 한쪽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기가 일수인 것이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겉으로 멀쩡한 지성인으로 뵈는 당신과 내가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 얼굴 또한 똑바로 가려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런 괴이한 현상을 정신분석에서는 감정전이(transference)라 부른다. 감정전이란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우리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반복강박증(repetition compulsion)의 일종이다. 옛날 감정뿐만이 아니라 옛날 상황을 그대로 반복하고 싶어하는 우리가 아닌가.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된 시집살이 한 며느리가 된 시어머니 된다'는 말이 있을까.

 

'transference'의 동사형인 'transfer'는 14세기 라틴어와 고대불어에서 가로질러(across) 운반한다(carry)는 뜻이었다. 'transport (운송하다)', 'transition (과도기)', 'translation (번역)', 'transmission (전송)'처럼 'trans'로 시작하는 단어는 하나같이 무엇을 가로지르고 횡단한다는 의미가 엄숙하게 앞장을 선다.

 

정신치료의 중요한 골격을 이루는 '감정전이'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시간여행(time travel)이 무수하게 일어난다. 언제가 언젠지, 누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이 여행은 딱히 휴가를 받지 않고 타임머신조차 없이 당신과 내가 얼마든지 시시때때 오를 수 있는 꿈결같은 여행이다.

 

나는 이제 목에 힘을 쫙 빼고 아주 유연한 마음으로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하며 소리치려 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 때문에 과거에 매달리는 판국에 나만 그렇게 물색없이 혼자 날뛰는 것도 사실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미친 사람들과 싱갱이를 하더니만 쟤가 드디어 미치는구나, 하며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서 량 2016.01.10

-- 뉴욕중앙일보 2016년 1월 13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