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은 꿈과 비슷하다. 간절한 소망이 망상으로 전개되는 수가 있고 절실한 기원이 꿈 속에서 성취되는 수도 많다.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는 충고도 맞는 말이지만 꿈을 간직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꿈이 현실화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은 꿈이 이루어지는 삶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과대망상을 정신병으로 취급한다. 과대망상이 기쁨의 원천이라는 말도 있지만 남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해 주지 않는 데서 막무가내로 불행이 싹튼다. 과대망상이 심한 사람들은 비참한 사람들이다.
'delusion (망상)'의 동사형은 'delude'다. 'love'의 명사를 우리말로 '사랑'이라 하고 동사를 '사랑하다'라고 하듯이 망상의 동사형을 '망상하다'라고 번역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말에 그런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망상에 빠지다', 하면 뜻이 통한다. 'delude'는 사전에 '착각에 빠지다,속이다, 현혹하다'라 나온다.
'delude'는 고대불어로 '~으로부터 (from, away)'를 뜻하는 'de'와 '놀다, 장난하다(play)'는 의미의 'lude'가 합쳐진 단어다. 착각에 빠지는 일이나 남을 속이는 행동이 장난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견해가 뻐근하게 인간적인 느낌이 든다. 'lude'가 처음에 들어가는 말로 'ludicrous'도 우스꽝스럽다는 뜻.
또 있다. 'elude (용케 빠져나가다)', 'collude (결탁하다)' 같은 말도'lude'로 끝난다. 음악용어'prelude (서곡)'도 원래 중세불어에서 가수나 연주자가 곡을 시작하기 전에 목청이나 악기소리를 가다듬는 것을 뜻했다. 록 콘서트 때 무대 마이크를 설치해 놓고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하는 순간들이 현대판 오페라의 서곡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망상(妄想)이라는 말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옥편에 망령될 망, 생각 상으로 나와있는 이 무서운 한자어에 해당되는 순수한 우리말은 없다. '망할 망(亡)' 밑에 '계집 녀(女)'를 깔면 '망령될 망(妄)'이 된다. 참, '망할 망'에는 도망가다, 잃다, 죽다, 잊다, 같은 나쁜 의미도 수두룩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희망이나 소망의 '바랄 망(望)'자에도 위쪽 왼편에 '망할 망'자가 떡 자리를 잡고 있다. 소망과 망상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 아닌가 한다. 까칠한 현실이 풍요한 미래를 소망하게도 하지만 과대망상의 터무니없는 위안을 염원하는 나와 당신이 아니던가.
망령(妄靈)은 국어사전에 '늙거나 정신이 흐려져서 말과 행동이 정상에서 어그러지는 상태'라 풀이하고 똑 같은 발음이지만 한자표기가 다른 망령(亡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 것도 당신과 나의 혼동과 공포심을 조장시킨다.
이상을 종합하면, 에헴, 서구적 망상에는 분명 장난끼가 숨어있지만 동양적 망상에는 도망갔거나 죽은 여자, 또는 잊혀진 여자의 이미지가 서려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시방.
프랑스의 여성화가 마리 로랑셍(Marie Laurenchin: 1883-1956)의 시, '잊혀진 여인'을 생각한다. 불쌍하기로는 가장 초보 단계가 따분한 여자, 그 다음이 슬픈 여자, 불행한 여자, 병든 여자, 버림받은 여자,고독한 여자 순서다. 그리고 쫓겨난 여자 다음은 죽은 여자, 끝으로 가장 불쌍한 여자로서 우렁찬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잊혀진 여자'가 유령처럼 등장한다.
20세기 초엽에 여자가 인류의 애절함을 대변했기 때문에 이 시가 호소력이 있었지만 여성상위시대인 21세기에는 로랑셍의 시에 나오는 여자라는 단어를 죄다 남자로 바꿔도 괜찮다고 우겨볼까 하는데. 죽은 남자보다 더 불쌍한 남자는 잊혀진 남자라는 센티멘털리즘에 사로잡히는 늦여름이라도 보내면서.
© 서 량 2015.08.09
-- 뉴욕중앙일보 2015년 8월 12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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