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한 당이 당의 이익을 위하여 반대 당을 힐책하는 기사를 읽는다. 정당들끼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특정 당을 두둔하는 언론 또한 흥미롭다.
언론의 중립성은 부재한다. 사람들은 손에 도시락 혹은 촛불을 움켜쥐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여론이 난무하는 광장에 조석으로 출두한다.
서기 628년에 중국 당나라 태종이 곡식에 극심한 피해를 주는 메뚜기 떼를 향하여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다 내 책임이다.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 하며 소리치며 메뚜기 두 마리를 꿀꺽 삼켰더니 메뚜기 떼가 몰살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기사를 읽는다. 그리고 메뚜기 떼들이 창궐할 때마다 우리 조선시대의 왕들은 중국의 태종을 들먹이면서 다 자기가 부덕한 탓이라고 자책했다는 사설로 여론을 조성하는 언론을 주시한다. 현세의 대통령에게 조선시대 왕 흉내를 내라고 몰아붙이는 압력이 참으로 크다.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책임자를 문책하는 일이다.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고방식에는 인간이 겪는 모든 재해는 꼭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과대망상적인 전제조건이 복병처럼 숨어있다.
책임(責任), 꾸짖을 책과 맡길 임! 법률용어로도 쓰이는 무거운 말이다. 사전은 '위법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법률적 불이익이나 제재를 가하는 일'이라면서 민사 책임과 형사 책임이 있다고 못박는다.
꾸짖을 '책(責)'에는 고대 중국의 화폐단위를 뜻하는 조개 패(貝)가 들어있고 이 형성문자는 빌려준 돈(貝)을 갚으라고 재촉이라도 하듯이 상대를 꾸짖는다는 뜻이라고 옥편은 풀이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꾸짖음을 받는다는 일이다.
영어의 'responsibility(책임)'에는 빚을 갚아야 하는 채무자의 스트레스가 없다. 이 단어는 'response(응답)'와 'ability(능력)'가 합쳐진 것으로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할 뿐이므로 민사 혹은 형사적 형벌을 연상하지 않아도 좋다.
'response'와 어원이 같은 'sponsor'는 후원하다, 또는 후원자, 시쳇말로 도우미라는 말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까칠한 사채업자가 영화에서처럼 야구방망이를 들고 불쑥 나타나는 장면과 웃는 얼굴로 문을 들어서는 당신의 스폰서를.
대답한다는 뜻의 'answer'를 공부했다. 'swear (선서하다, 욕하다)'와 어원이 같은 이 쉬운 단어는 고대영어로 법정에서 반론을 제기하기 위하여 맹세한다는 뜻이었다. 당신은 고개를 갸우뚱하리라. '응답=반론=맹세=욕하기'라는 등식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으로.
아니, 이 등식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상대방의 질문에 응답하는 심리에서 여차직하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고 자기의 신념이 옳다고 맹세하다가 수틀리면 욕설이라도 퍼부을 수 있는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마음가짐이 바로 양키들의 'responsibility'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책임자의 잘잘못을 가리려고 혈안이 된다. 당신은 'What went wrong? (뭐가 잘못됐지?)' 하며 영어로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고대영어로 'wrong'은 원래 '꼬인, 삐뚤어진'이라는 뜻이었다. 빨래를 비틀어서 물기를 뺀다는 뜻의 'wring'도 'wrong'과 어원이 같다.
나는 당나라 태종과 조선시대 왕들에게 간곡하게 알려주고 싶다. 그 당시 무고한 백성을 괴롭혔던 메뚜기 떼들의 출현은 사람의 지혜로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생태계의 여러 요소들이 꼬이고 꼬여서 일어난 재해였을 뿐, 절대로 그들이 부덕했던 소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본주의를 수호하려는 엄청난 야심 때문에 마치도 빚쟁이에게 시달릴 때처럼 그들이 새빨간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그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괜찮았을 것이라고.
© 서 량 2015.06.28
-- 뉴욕중앙일보 2015년 7월 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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