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 환자들에게 ‘trauma’에 대하여 강의를 한 후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고 그 말을 ‘외상(外傷)’이라 번역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웬만하면 영어를 한국말로 만들어버리는 우리 습관에 따라 ‘trauma’를 그냥 ‘트라우마’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정신과 용어로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 한다. 이미 ‘스트레스’는 우리말이기 때문에 ‘PTSD’도 어려운 번역을 피하고 ‘피티에스디’라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적 외상은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외상이 크면 클수록 상처도 크다. 천재지변, 전쟁, 화재, 폭행, 강간, 학대, 대형사고 같은 것들이 흔한 예다. 이런 경험은 급성(急性)일 경우가 많지만 일제 강점기간이나 북한의 육이오 남침 같은 역사 따위는 만성(慢性)적인 트라우마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소한 상처 또한 곤혹스러운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한잔 술에 눈물 난다’는 우리 속담만 해도 그렇다. 상대가 내게 술을 권하리라는 기대가 어긋났을 때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서러움이 북받쳐 사람 마음이 와락 무너지는 상황의 극적인 묘사다.
가난 때문에 허기에 시달렸던 발육기가 평생토록 성격의 텃밭이 되는 수도 있다. 부모 사랑을 못 받은 경험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시대배경이나 사회환경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누구도 이상적인 성장기를 누리지 못한 것 같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부른 우리의 삶 자체가 흠집투성이라는 말이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프로이트 제자 중에 이상한 학설을 내세웠던 오토 랭크(Otto Rank: 1884-1939)는 우리의 신경증세가 출생의 트라우마(birth trauma)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큰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가 험난한 산도를 통과한 아픔 때문이고 그 심리상태가 평생 지속된다는 견해다.
17세기 말에 중세 라틴어와 희랍어로 상처, 혹은 패배를 의미했던 ‘trauma’는 전인도 유럽어로 문지르거나 비튼다는 뜻이었고 ‘throw (던지다)’와 같은 말뿌리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던진 돌에 맞아 상처를 입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볼지어다. 프랑스 실존주의의 태두 사르트르가 20세기에 설파한 ‘던져진 존재’인 당신과 나에 대하여.
너무 상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릴 적 꽃밭에서 넘어져 깨진 무르팍에 새살이 생기듯 마음의 상처 또한 끝내 곱게 아무는 것이다. 깊은 밤 꿈결을 스치는 검은 상처의 블루스 멜로디가 주는 위로에 마음을 흠뻑 적시는 당신이 아니던가.
나는 트라우마의 치료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소의 되새김질을 거론한다.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스스로에게 주어진 환경을 마스터하고자 한다. 연주자가 어려운 부분을 몇 백 번을 반복 연습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우리는 소화하기 힘 드는 트라우마의 내용을 삭히지 못한 음식처럼 역류시켜 다시 씹어 삼킨다. 가끔 생목이 올라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그 어려웠던 경험을 곰곰이 되새김질하는 동안 우리의 상처감각은 정신적 신진대사를 거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상처의 흔적조차 점차 옅어진다.
무지막지한 미국적 낙천주의를 대변하는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굵은 목소리로 뇌까린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Your struggles make you stronger.” -- 당신의 발버둥이 당신을 더 튼튼하게 만든다. --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대전제와 ‘던져진 존재’라는 실존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숱한 트라우마를 되새김질하는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오늘따라 궁금하다. -- 2015년 7월 26일 여동생 서정슬 시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 서 량 2015.07.26
-- 뉴욕중앙일보 2015년 7월 2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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