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대하여 환자와 논쟁이 붙는다. 60살의 백인 여자는 스스로의 우울한 기분을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매일을 적극적으로 불쾌하게 지내는 입원환자다.
그녀는 우울증을 당뇨병이나 간경화증 같은 신체질환으로 간주하는 현대의학적 사고방식을 추구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신질환은 응당 정신과의사가 고쳐놓아야 할 숙제이고 그녀의 마음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mental repairman (정신 정비공 ?)'의 전유물이다.
애초에 우울증을 달갑지 않은 방문객에 비유한 것이 내 잘못이다. 나는 그 밉살스러운 친구를 잘 타이르고 어르고 달래고자 한다. 그를 쫓아내려고 모욕적인 말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에 빗대어 놓고 말하면 매우 난처한 상황이 된다. 그녀는 우울한 아버지나 남편을 집에서 쫓아내고 싶어한다. 만약 그녀가 한국여자라면 최근 학교성적이 나쁘게 나왔다고 해서 홧김에 자식에게 집을 나가라고 닦달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우울한 심정을 적(敵)을 대하듯 하는 마음은 참으로 무서운 정신상태다. 그런 사고방식이 극에 달했을 때 스스로의 꺼림칙한 증상을 퇴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살이라는 감정이 북받칠 수도 있겠다.
인생을 비관하는 친구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키우라고 다그친다면 그것은 그에게 우울한 마음을 끝장내라고 달달 볶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쯤 되면 좋은 충고라기 보다 값싼 잔소리다. 양키들도 그런 친구에게 "Snap out of it! (툭 털어버려!)" 하며 호들갑을 떤다. 누구나 쉽게 그럴 수 있다면 세상에 있는 정신과의사와 심리상담사들은 죄다 굶어 죽을 것이다.
추석 귀성길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취직했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하는 집안 어른들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다. 살이 많이 쪘다는 둥, 누구는 명문대학을 갔다는 둥, 어르신네들의 철딱서니 없는 발언이 젊은이들을 슬프게 한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고향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유년기의 향수가 배어있는 그리움의 대상인 심리적 고향이고 둘째는 명절만 되면 귀성길에 올라 교통체증과 싸우는 본적지, 즉 우리의 현실적 고향이다.
고향(故鄕)은 옥편에 연고 고, 시골 향으로 나와있고 어떤 연유가 있는 시골이라는 뜻으로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엄숙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영어의 'hometown'은 가정(home)이 있는 'town'이므로 친근하고 정겨운 단어로 느껴진다.
'home'은 고대영어로 'ham'이라 했고 단순히 '사는 곳'을 뜻했다. 우리의 고향은 출생지를 말하지만 양키들은 살고 있는 현주소가 고향이다. 우리의 과거지향적 고향과 서구적 현재진행형의 고향은 서로 의미가 딴판이다. 당신의 고향은 그리움과 격식의 대상이지만 미국식 홈타운은 내가 편하게 발 뻗고 지내는 곳이다.
양키 친구가 "Make yourself at home!" 하면 고향에 성묘 가는 전통보다 흉허물 없이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는 아주 소탈한 메시지다. 'home free'라는 관용어 또한 어떤 일의 힘든 상황이 지나가고 속 편하고 기분 좋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당신의 우울한 친구는 옆자리에 앉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Past this hump, we're home free!" (이 고비만 넘기면 우리는 탄탄대로야!)
당신의 고향이 마음 편한 곳이기를 바란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전 국민이 피난이라도 가듯 정신 사나운 교통전쟁과 아직까지 취직도 결혼도 하지 못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어르신네들의 둔감하고 강압적인 발언에 고통을 당하는 그런 우울하고 답답한 행로가 아니기를 기원한다.
© 서 량 2014.09.07
-- 뉴욕중앙일보 2014년 9월 10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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