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환자가 내게 쌍소리를 한다. 영어로 듣는 욕, 'four letter word'는 우리말 육두문자(肉頭文字)에서 오는 짜릿한 굴욕감이 별로 없다. 양키들의 욕은 스펠링이 네 개이므로 발음도 짧다. 허기사 우리말 욕도 짧기는 마찬가지다. 자고로 욕이란 화급하고 간결해야 제 맛이 나는 법!
그 분열증 환자에게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며 타일러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의사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ah, and uh, even when you say the same word!' 하며 순 한국식 영어를 하는 환상에 빠진다.
말(言)의 어원을 찾으려고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을 쏘다녔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다음과 같은 학설을 내세운다.
'마실 가다'는 우리말 사전에 '마을 가다'의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또는 북한 사투리라 나와있고 '마을에 놀러 가다'는 뜻이라 설명한다. 당신과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이 정겨운 말은 저녁 식사 후 어느 먼 동네가 아닌 가까운 옆집에 어슬렁거리며 들리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런 여유작작한 행동은 노름 같은 특정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다를 떨고 싶어서 남들을 만나려는 인간적인 정황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마을 가다'의 음절이 줄어들어 '말 가다'가 된 후 나중에 '말하다'로 변했다는 논설이 가능하다. 그리고 동사형 '말하다'에서 명사형 '말'이 풍악 소리도 요란하게 탄생했다는 추론 또한 너끈히 성립된다.
옥편은 언어(言語)를 말씀 언, 말씀 어라 풀이한다. 이렇게 옥편은 모든 '말' 대신에 말씀이라는 높임말을 쓰지만 '말씀 드리기 죄송하오나' 할 때의 말씀은 자신의 말을 낮추는 말투다. 복잡하다. '말씀 변(辯)'에도 가운데의 '말씀 언'을 양쪽에서 '매울 신'이 감싸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말 잘하는 변호사의 말이 맵기 때문일까. 말에도 맛이 있다는 말인가?
'word'는 약 천년 전에 사용되던 고대영어로 약속이라는 뜻이었다. 아직도 'keep one's word'라는 현대어에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를테면 'You have my word' 하면 약속하겠다는 말이고 'You broke your word'는 약속을 어긴 상대를 나무랄 때 쓰는 표현이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믿을 신(信)의 한자 모양만 봐도 사람의 말은 믿으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구적인 약속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 약속을 믿지 못하면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명시하듯 태초에 말이 있었고, 말이 신과 함께 있었고, 말이 즉 신이었다는 부분도 나나 당신이 평생을 금과옥조로 삼아 볼만한 말인 것이다.
1990년대부터 감탄사 비슷하게 쓰이기 시작한 흑인 속어에 'Word!'를 우리말로 뭐라 할까 하다가 '맞아! 진짜! 그래!'로 옮겨 놓으니 그럴 듯하다. 우리말 유행어로 '내 말이!'에 가장 가까운 번역이랄까. 'He is a son of bitch! -- Word!' (그놈은 암캐의 아들이야! -- 내 말이!)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금가곡(古今歌曲)에 나오는 작자미상의 시조가 생각난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 것이 / 남의 말을 내가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 이쯤 해서 나는 목청을 가다듬은 후 노자 도덕경의 명언 '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에 대하여 삿대질이라도 해가면서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은데.
© 서 량 2014.09.21
-- 뉴욕중앙일보 2014년 9월 24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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