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18. 서서 움직이는 상태

서 량 2014. 10. 6. 10:44

 내과의사들은 '신체검사'를 하는데 정신과의사들은 '정신감정'을 한다. 영어로는 각각 'physical examination' 'mental state examination'이라 한다. 후자를 문자 그대로 옮기면 '정신 상태 검사'가 된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몸은 비교적 천천히 변하지만 마음이란 시시각각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굳이 '상태'라는 보조관념이 필요한 것 같다. 내과의사들보다 정신과의사들이 환자를 향하여 한층 더 역동적이고 예민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mine'은 고대불어와 라틴어에 거의 같은 말이 있었는데 질문하다, 고문하다, 또는 테스트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신체검사를 할 때 내과의사들도 몇 마디 물어보기는 하지만 정신과의사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질문을 해가면서 환자를 보는 관습이 있다. 같은 말을 짧게 줄인 'exam(시험)'이라는 단어는 대학입시건 무슨 면허시험이건 모든 수험생들이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 드는 상황이다.   

 

 왜 정신과의사들은 신체검사에 대응하는 정신검사를 하지 않고 정신감정을 하나? 병아리 감별사같이 정신감별이라는 개념이라도 괜찮을 텐데 왜 하필이면 감정인가. 이것에 대하여 나는 평소에 감정이 많다.

 

 섭섭한 마음을 품는다는 의미로 누가 당신에게 감정이 있다고 말한다면 다분히 부정적인 발언이다. 한자로는 감정(憾情)이라 표기하고 '섭섭할 감'에 뜻 정이라 풀이한다. 사람이 감정(感情)의 동물이라 할 때는 '느낄 감'이다. 게다가 정신감정이나 보석감정 같은 감정(鑑定)'거울 감'에 '정할 정'이 붙는다. 전문의가 서명날인하는 정신감정은 거울처럼 평탄한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설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정신과의사도 더운 피가 도는 사람이거늘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mental state (정신상태)' 'state'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고대불어와 라틴어로 장소, 위치, 조건, 상태 등을 지칭하는 이 말은 전인도 유럽어로 서다, 'stand'라는 뜻이었다.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일컫는 'statue(동상)'와 어원이 같다. 미국을 뜻하는 'United States' 50개의 주()가 눕거나 앉아있지 않고 우뚝 서 있는 엄청난 모습이다.

 

 상태(state)는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운동성을 내포한다. 움직이는 것들은 불안정하다. 사람의 마음은 조석으로 변한다. 특히 생물학적으로 육아의 임무를 타고난 여성의 민감한 기질을 베르디(Verdi)는 오페라 리고레토(Rigoletto)에서 'La donna e mobile'라는 아리아를 통하여 바람에 날리는 갈대에 비유한다. 이때 이태리어 'mobile''변덕스럽다'는 뜻이지만 모계사회에 속하는 우리는 이 노래를 그냥 '여자의 마음'이라 싱겁게 번역하고 있다.

 

 'mobile' 15세기말 스펠링이 똑같은 중세 불어와 많이 비슷한 라틴어에서 빠르게 움직이거나 쉽게 변한다는 의미였다. 쉽게 말하면 'mobile''movable', 즉 이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La donna e mobile' '여자는 이동식'이라 정확하게 번역해야 된다고 우기고 싶은 고지식한 감정(感情)이 싹튼다.

 

 며칠 전에 성격장애 여자환자와 심한 말다툼을 한 뒤끝에 난데없이 심수봉의 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생각났다. 연이어 '라 돈나 모빌레'의 멜로디도 떠올랐다. 심수봉이 노래하는 항구처럼 확고부동한 한국여자와 바람결 갈대 같은 이태리 여자가 정반대라는 말일까, 과연 그럴까, 하다가 생물학적으로 올챙이처럼 긴 꼬리를 흔들면서 질주하는 변덕이 죽 끓는 듯한 부류는 역시 남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 서 량 2014.10.5

-- 뉴욕중앙일보 2014년 10월 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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