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07. 거짓 희망

서 량 2014. 5. 4. 21:48

 2013년에 나온 'K-pop' 가수 송지은의 노래에 '희망고문'이라는 곡이 있다. 가사는 남자가 여자의 사랑에 대한 미미한 희망을 비정하게 배신하는 내용이다. 199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단어 '희망고문'은 인터넷 영어사전 'Urban Dictionary'에 이미 'hope torture'라 등록됐다.

 

 2014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구조작업 도중 유가족들에게 거짓 희망을 불러일으킨 '다이빙 벨'이 결국 '희망고문'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바다 속 엘리베이터라고 불렸던 첨단장비 다이빙 벨은 끝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진도 앞바다에서 사라졌다.

 

 '바랄 희, 바랄 망', 희망(希望)처럼 사고나 참변을 당한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가 또 있을까. 희망 외에도 소망, 앙망, 선망, 욕망, 갈망, 열망, 야망, 대망 등등 망()자가 들어가는 말이 숱하게 많다.

 

 실망, 낙망, 절망, 책망, 원망 등 부정적인 내용을 지칭하는 망()도 수두룩하다. 같은 말을 옥편은 '바랄 망' 말고 '보름 망'이라 풀이한다. 망월(望月)은 보름달이다. 우리는 하나같이 보름달을 보면서 무엇인지를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반면 절대로 초승달이나 그믐달에게 무슨 부탁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농사일로 바쁜 달, 망월(忙月)에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 소원이란 사람 마음이 보름달의 음기로 충만했을 때 잘 이루어지고 마음이 바빠 정신집중을 못하면 여의치 못하리라는 추정이다.

 

 'hope'는 어원미상인 고대영어 'hopian'이 변한 말로 희망하고 기원한다는 뜻이다. 펄쩍 뛴다는 의미의 'hop'에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그럴 듯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hope'보다 느긋하고 다소곳한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현대영어로 'wish'가 있다고 당신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영어에서 'wish'는 열망한다는 뜻의 전인도 유럽어 'wen-'에서 유래했을 뿐더러 사랑의 여신 'Venus' 또한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말이다. 결국 wish=desire=Venus (기원=열망=사랑의 여신)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염원과 욕망과 애욕이 다같이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짐짓 인정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wish'에 그다지도 격한 감정이 숨어있다면 우리들 귀에 단순하게만 들리는 'expect'는 어떤가. 아뿔싸, 'She is expecting'은 그녀가 막연히 무슨 상황을 기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목하 임신 중이라는 말이로구나!

 

 욕망이나 절망처럼 끈적하고 괴로운 감정과 결부된 바라봄()도 있지만 관망이나 전망처럼 조용하고 중립적인 심리와 연결되는 눈길도 있다. 사태의 절박함에서 거리감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이 부여된 사람들은 걸핏하면 기다렸다는 듯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떠들썩하게 아파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망'이라는 뜻의 'perspective'에는 균형이나 원근법이라는 서늘한 뉘앙스가 깃든다.

 

 고대불어와 중세 라틴어에서 입수되어 14세기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perspective'의 본래 뜻은 광학(光學) 또는 빛의 도움으로 사물을 환하게 '살펴본다(inspect)'는 의미였다. 여기에는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이 오직 냉철한 시각적 관찰만이 존재할 뿐이다.

 

 거짓 희망에 매달리느니 차라리 절망을 받아드리는 마음가짐을 생각한다. 절절한 바램()이 끊어진 아픔의 무풍지대 속에서 천천히 태어나는 한 송이 지혜의 꽃을 응시하는 관조의 힘이 생길 수 있으면 한다. 거짓 희망에게 고문을 당하느니보다 차라리 절망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저 처연한 망각에 침잠할 수 있다면.

 

© 서 량 2014.05.03

-- 뉴욕중앙일보 2014 5 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