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정신과 입원환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연말 증후군'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미국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찰리 브라운이 매해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울해 한다는 말도 했다.
당신과 나처럼 마음이 불안정할 때가 많은 찰리 브라운은 늘 'security blanket', 안전 담요(?)를 들고 다니는 머리 좋고 성격이 원만한 친구 라이너스(Linus)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I just don't understand Christmas, I guess. I like getting presents and sending Christmas cards, and decorating trees and all that, but I'm still not happy. I always end up feeling depressed." ("...내 생각으론 도무지 크리스마스를 이해할 수가 없어. 선물을 받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것 따위를 좋아하지만 난 여전히 행복하지 않아. 언제나 기분이 우울해지는 거야.")
그렇다. 찰리 브라운뿐만 아니라 연말과 새해가 다가오면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속 깊은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서로 선물과 덕담을 주고 받는다. 가족끼리 만나는 추수감사절 때부터 수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사람들이 공연히 시끄럽게 웃고 말이 많아지는 스트레스 증상을 보이는 한겨울이다.
한 해가 기우는 12월에 미국은 극심한 흥분에 시달리는 'sensory overload', 과잉자극 상태에 빠진다. 잦은 송년회와 연말파티를 거친 후 마침내 타임스 스퀘어에 제야의 크리스털 볼이 서서히 내려오는 카운트다운의 광적인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sensory'는 'sense(감각)'의 형용사. 'sense'는 14세기경 고대불어 'sens'와 라틴어의 'sensus'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래 알아차리거나 이해한다는 뜻이었고 오감(五感)이라는 감각적 의미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생겨났다. 그래서 'nonsense'는 감각이 없다기보다 원 뜻에 준하여 허튼 소리라는 말이다.
'sense'와 같은 말 뿌리의 현대 불어 'sentir'는 맛과 냄새와 느낌을 두루두루 뜻한다. 맛이며 냄새며 느낌이 좋은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후각과 미각과 정감을 세세히 분별하지 않는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하지 않았던가.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 사이에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절차가 겨울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 겨울은 죽음, 혹은 동면 같은 가사상태의 계절인 것을 어찌하랴.
우리 미약한 인간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하여 체온과 에너지가 떨어지는 겨울이 되면 결속을 다짐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죽음에 맞서는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연가(戀歌)는 결코 여름에 불려지지 않는다. 황진이가 한 허리 베어내는 동짓달 기나긴 밤이며 2002년에 우리의 심금을 울린 TV 드라마 '겨울연가'도 하나같이 혹한의 추위에 항거하는 애정의 몸짓들이다.
엄동설한의 겨울에 라이너스는 찰리 브라운의 여위고 앙상한 크리스마스 트리 밑동을 자신의 '안전 담요'로 소중히 감싸준 후 이렇게 말한다.
"I never thought it was such a bad little tree. It's not bad at all, really. Maybe it just needs a little love." ("이렇게 작고 엉망인 나무인줄을 전혀 몰랐네. 근데 이건 진짜 절대로 엉망이 아니야. 사랑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야.")
당신과 나의 새해도 조그만 사랑이 깃든 겨울이기를 바란다.
© 서 량 2013.12.29
-- 뉴욕중앙일보 2014년 1월 2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컬럼| 200. 고삐 풀린 망아지 (0) | 2014.01.27 |
---|---|
|컬럼| 199. 힘 (0) | 2014.01.16 |
|컬럼| 197.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 (0) | 2013.12.16 |
|컬럼| 196. 수프에 빠지다 (0) | 2013.12.03 |
|컬럼| 195. 속이 편해야 (0) | 2013.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