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97.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

서 량 2013. 12. 16. 10:26

2013 12 14일에 뉴저지 티넥(Teaneck)의 홀리네임 병원(Holy Name Medical Center)이 개최한 정신건강 엑스포 'Family Mental Health and Addiction'에서 강연을 하기로 했다가 폭설 때문에 불참해서 못내 아쉬웠다.

 

'addiction' 16세기에 생긴 라틴어 'addictus'에서 유래한 말. 본래의 뜻이 '배달하다'였고 나중에 자신을 '넘겨준다'는 추상적 의미가 바닥에 깔린 '중독'으로 변했다.

 

약물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이미 약물에 몸과 마음을 넘겨준 사람들이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남녀들이 사랑의 힘에 몸과 마음이 한껏 지배당하는 그림과도 같다.

 

'Dopamine (도파민)'이라는 의학용어는 원래 사람의 감정과 관련된 특정 화학물질을 뜻했지만 근래에는 쾌락을 지칭하는 일상용어가 됐다. 하다못해 연말에 40퍼센트 세일을 한다는 광고를 보는 순간 소비자들의 도파민이 급상승한다는 말을 티브이에서 오늘만 해도 여러 번 들었을 정도다.

 

2013 7 3일에 뉴욕 타임즈는 도파민에 대하여 대서특필을 했다. 도파민이 사랑이며, 색욕이며, 불륜에 관계하는 화학물질이고 동기의식과 집중력과 중독현상의 원인이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도파민은 우리 마음에 있어서 그야말로 '약방의 감초'에 해당된다.

 

중독현상의 원인으로 'priming'을 내세우는 학설도 있다. 'prime'은 동사로 '준비시키다, 미리 알려주다' 또는 '그림이나 벽에 애벌칠을 하다' 그리고 '펌프에 마중물을 붓다' 라는 뜻이다. 이때 'prime'은 어떤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행동의 시작 부분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유도현상'이라 한다. 오페라로 치면 극의 내용을 예고하는 서곡이다.

 

 중독이 아니더라도 'priming'은 도처에 즐비하다.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처음에 손을 잡고 얼마 후 키스를 하고 점점 궁극적인 방향으로 진척되는 일련의 행동을 보라. 페인트로 벽에 애벌칠을 하거나 펌프에 마중물을 붓는 상태가 다음 단계를 유도하는 현상과 같지 않은가. 입에 넣은 땅콩 하나가 또 하나의 땅콩을 불러들이고 두 번째의 땅콩이 다른 땅콩들을 계속해서 유인하는 것도 똑같은 작용기전이다. 사랑도 땅콩도 그 자체의 생명력이 사태의 진전을 재촉한다.

 

중독(中毒)이라는 한자를 살펴 보았다. 中은 현재진행을 의미하고 毒은 어미 母와 새싹을 뜻하는 날 生자의 첫 획이 빠진 두 글자로 이루어진 합성어. 그래서 毒은 아기를 낳은 어미 모습이다. 이것은 여자가 출산 후에 몸에 독소가 생긴다는 뜻일까. 아니다. 여자가 애를 낳은 후에 몸의 독기가 빠져나간다는 통설이 있지 않은가.

 

毒자를 잘 들여다보면 아이를 보호하는 모성본능의 모질고 사나운 정경이 떠오른다. 그런 지독(至毒)한 상황이 바로 출산에 뒤이어 종족보존을 위하여 격렬한 발동이 걸리는 어미의 마음이다. 이때 毒은 청산가리 같은 독약이 아니라 초긴장 상태의 보호본능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 한국 티브이 드라마에 왜 그리도 독살스러운 시어미가 판을 치는지 모르겠다. 늙은 시어미는 아들을 싸고돌면서 젊은 며느리를 구박한다. 엄마의 과잉보호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은 엄마중독의 품 안에서 버둥거린다. 결국 한국남자들을 지배하는 것은 다정한 사랑의 손길이거나, 고소한 첫 번째 땅콩이거나, 폭탄주 한 잔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저 과잉의 모성일지도 모른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William Blake(1757-1827)'는 설파한다. 'The road of excess leads to the palace of wisdom' (과잉의 길이 지혜의 궁전에 도달하리니.)

 

 

© 서 량 2013.12.15

-- 뉴욕중앙일보 2013 12 1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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