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93. 가을, 그리고 그리움

서 량 2013. 10. 21. 12:24

 아무래도 가을을 그리움의 계절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창 밖의 떡갈나무들이 기우뚱 허리 숙여 잎새를 떨구는 10월 하순쯤 짙푸른 하늘을 힐끗 올려보면서 당신은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 치솟아 오를 것이다. 그런 그리움은 일상적인 마음으로서는 얼른 알아차리기 힘들고 신비스러운 그리움이다.

 

 2013 10 5일에 뉴저지에서 열린 정재옥의 수필집 <티티새 연가> 출판 기념회에서 짧은 서평을 맡았다. 나는 그녀의 수필이 풍기는 향취가 한 마디로 그리움을 주제로 한 것이라 치부했다. 지난 시간과 떠나온 장소와 사랑했던 사람을 향한 그리움 따위를 뻔질나게 테마로 삼는 우리지만 기실 그리움이란 과거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는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리워하다()' '그리다()'에서 유래했다. 그리움은 마음으로 눈에 삼삼한 그림을 그리는 상태다. '그리다', '긋다', '긁다'가 모두 말의 뿌리가 같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그리움을 글자로 나타내면 글이 되고 종이나 캔버스에 오묘한 선과 색깔을 입힌 결과가 그림이다. 글도 그림도 선을 긋는 것이 기초작업일 뿐 아니라 둘 다 우리 삶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는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그림도 잘 그리거니와 화가들도 글을 잘 쓰는 것이 크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의학적으로 '언어중추' '회화중추'는 대뇌 속에서 아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림이라는 뜻의 'picture' 15세기에 생긴 말이고 그보다 먼저 13세기에 일찌감치 'paint'라는 단어가 두루 쓰이고 있었다.

 

 'paint'는 원래 전인도 유럽어 '*peik-' 'cut(자르다), carve(각인하다)'는 뜻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인류 최초의 화가가 동굴 벽에 금을 긋고 암석을 깎아 사람이나 동물의 형체를 각인하는 정경을. 그리고 다시 유추해 보라. 마침내 무궁한 세월이 흘러 상형문자가 만들어지고 현대의 텍스트가 애용되면서 수 많은 글쟁이들이 쏟아 놓은 그리움의 결과를.

 

 현대영어의 구어체로 곧잘 쓰이는 그리움을 의미하는 말로 'miss'가 있는데 영한사전에 "(목적, 위치, 표준,욕망에) 못 미치다."라 나와 있다. 누가 당신에게 "I miss you."라 쓰여진 예쁜 그림엽서를 보냈다면 그가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내막이지만 직역으로는 그가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는 너무나도 싱거운 표현이다. 만나지 못하니까 무얼 어쩌라는 말일까.

  

 미 남부 사람들이 그립다는 뜻으로 쓰는 'hanker'가 있는데 이 말은 '매달리다'는 뜻의 'hang'에서 유래했다.어느 양키 친구가 "How are you doing? (어떻게 지내?)" 하고 물었을 때 당신이 "Hanging in there! (버티면서 지내지!)" 응답하는 바로 그 'hang'이다. 사람이나 사물을 향한 그리움이란 그 대상에 매달리는 안타까움이 사무치도록 잦아드는 법이거늘.

 

 '그리워하다' 점잖은 표준영어 'yearn'은 고대영어로 '열망하다(desire)'는 뜻이었다. 마음속으로만 모종의 그림을 그리는 우리의 곱상한 심리상태에 비하면 아주 노골적인 표현이다. 열망한다는데야 무슨 더 할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말은 추상적인 표현일 때가 많고 남녀가 서로를 뜨겁게 원하는 뜻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샛노란 낙엽을 떨구며 옷을 벗는 떡갈나무를 보면서 문득 어떤 그리움이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 부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의 노예가 되기를 바란다. 당신이 과연 내 제안을 받아드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순전히 타고난 체질에 달렸겠지만

 

 

© 서 량 2013.10.20

-- 뉴욕중앙일보 2013 10 23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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