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글동네/시

포도를 으깨다 / 최양숙

서 량 2012. 12. 15. 01:13

           

           

            포도를 으깨다

 

                         최양숙


 

고목의 마른 가지 위

분홍빛 테두리에 감긴 잎이

태초의 기운처럼 솟았습니다

쏟아지는 빗물에 미역을 감고

뜨거운 해에 말려가며

농부의 얼굴에 서린 붉음을 삼켰습니다

 

시계방향으로 비틀린 가지에 침묵을 담았습니다

생명선의 손금이 길게 퍼진 넓은 잎사귀에는

저녁 달의 푸름을 가두었습니다

 

뿌리가 빨아들인 땅의 기다림이

붉은 핏줄을 따라서 순환할 때

고단한 여정은 먹빛에 감추고

더 이상 잠가 놓을 수 없는 생명의 기운

과육의 껍질에 올라온 가루에 입혀서

겸손히 매달렸습니다

 

그리고는 달고 향기로운 이름을 남겼습니다

다산을 꿈꾸는 자가 훔친 송이에는

기쁨의 씨앗이 알알이 박히고

넝쿨처럼 번져가는 길조는

껍질을 으깨는 손을 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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