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수박 / 김정기

서 량 2023. 1. 6. 18:31

 

 

수박

 

                       김정기

 

평온의 숲에 칼끝을 대니

붉은 도시에 흐르는 냇물은 맑고 깨끗하다.

내 책꽂이에 꽂힌 난해한 시같이 길을 못 찾아

내가 내는 도시계획대로 사각형을 만들고

그날 친정집에서 먹던 달콤함이

이 마을에 넘친다.

당신의 임지에서 듣던 나팔소리에 섞여 총성이

수박 안에 가득해 터져 나올 때

사방에서 갈증이 물소리를 낸다.

수박은 이미 지난 시간을 향해 구르고 굴러

닿을 수 없는 도시의 길목을 지키고

수박 씨 같은 글씨로 소설을 쓰던 큰오빠가

무겁던 젊음을 지고 걸어오고 있다.

 

내가 수박을 자르고 있는 이 밤에

세월은 물구나무를 서서 엉키고 있다.

 

© 김정기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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