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행렬 / 김정기

서 량 2023. 1. 6. 18:27

 

행렬

 

               김정기

 

 

우리 동네 잔디들은 짧고 푸르다

깃발도 없이 행진하는

그들은 말이 없다

혹인 촌 아파트 창밖에 널린 빨래

그 남루함에 몸을 떨던

동양여자는 이제 사위어가서 한 포기 잔디로 서 있다.

브람스 심포니 1번 1악장이 전하는 禮砲는

명중하여 꿈속으로 들어오고

말없던 행렬은 몸부림치며

끝없이 광장을 향해 돌진한다.

우우우 바람소리도 길고 우렁찬데

함께 벼락을 맞고도 이어지는 우리는

알고 보니 혈육이다

마른 흙을 뚫고 세상과 얼굴을 대할 때

이미 시들어 있는

가장 길었던 밤은 지나고

잔디 위에 이슬은 아침 볕을 과식한다.

 

© 김정기 2012.06.25

'김정기의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 병 / 김정기  (0) 2023.01.07
수박 / 김정기  (0) 2023.01.06
물의 이력서 / 김정기  (0) 2023.01.06
무거운 깃털 / 김정기  (0) 2023.01.05
새 아침의 기도 / 김정기  (0) 2023.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