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은 묵상 중
최양숙
씨방이 여문 도라지 대를 뽑으려다
내년에 밝힐 보랏빛 초롱을 떠올리며 밑동을 자른다
잿빛 솜무더기마냥 풀어진 쑥부쟁이 해어진 꽃무더기도
기운을 다 잃은 터 맥없이 끌려 나온다
흙 바닥을 기는 풀넝쿨이 이파리는 푸르지만
화단을 뒤덮기 전 말려야 하는 불청객이다
목장갑 낀 손으로 넝쿨을 뜯어 올리면 부드득거리며
살려줘요 하는 비명이지만 한번 손갈퀴에
옆으로 뻗은 열 뿌리 달려 나오는 재미에 못들은 척이다
솔씨의 날개 타고 뿌리내린 손가락만한 아기소나무
꽃밭 가운데 거인같이 자랄까 봐 청초해도 잡풀일 뿐
한 팔만 쑥 자라 오른 사철나무 가지도 사철 푸르겠지만
모양을 못 갖춰 전지가위 안에서 아프게 베인다
코스모스가 허리케인에 처형당한 듯
몇 자락 안 남은 꽃송이가 폐허 속 노숙자다
이러저리 쓰러져있다 뿌리 채 뽑힌다
지난 계절 명랑했던 화단은 묵상 중
가을 볕에 흙 빛이 정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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