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문화
최덕희
사월이 팡파레를 울린다.
벚꽃이 팦콘처럼 펑펑 터지고 아그배나무의 흰꽃잎이 바람을 맞아 살랑거린다.
보랏빛 크로커스와 노란 민들레가 연둣빛 잔디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수선화와 튜울립도 앞을 다투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사월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자애로운 햇살을 골고루 뿌려 황폐한 대지를 어루만지더니 밤사이 단비를 내려 마른 목을 촉촉 축이었다. 땅 속에서는 아직 잠들어 있던 것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음인지 일제히 기지개를 펴며 부산스럽다. ‘사월은 살아있는 것들의 축제의 달’이라고 이름 붙여본다.
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러 나갔다. 집 앞 화단에 돋나물이 뾰릇뾰릇 돋아나고 꽃이 막 피기 시작한 크로커스와 수선화 사이로 제법 길쭉하게 자라 올라온 부추를 칼 끝을 깊숙이 넣어 저미듯 도려내어 바구니에 담았다. 미나리와 민들레 어린잎도 몇 잎 뜯어 섞었다. 겨우 내 진통을 겪고 봄철에 처음 나는 나물은 보약보다도 몸에 좋다고 한다.
참나물은 지혈제와 해열제로 쓰이며 고혈압, 중풍, 신경통에 좋다. 돋나물은 돌나물이라고도 불리며 피를 맑게 하고 혈액순환을 도와준다. 비타민이 풍부하고 칼슘이 우유의 두 배나 된다.
부추는 동맥경화와 심장질환에 좋으며 협심증의 명약이다. 민들레는 위염과 위궤양에 효과적이다. 신선이 먹는 풀이라고도 불린다. 봄철에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달래이다.
탄수화물, 칼슘, 무기질이 풍부하여 봄철에 가장 먼저 임금님께 진상되는 고급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눈만 돌리면 잔디밭에 길가에 우리가 밟고 다니던 잡풀들이 다 약재였다. 의약품이나 의료시설이 부족했던 그 옛날에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흰밥 한 주걱 넣고 깨끗이 씻은 나물에 초고추장, 깨소금, 참기름 듬뿍 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혀끝에 감도는 쌉싸름하고 신선한 감각. 이제 한철 내내 내 단골 메뉴는 비빔밥일 것이다. 비빔밥도 종류가 많다. 우리나라 전라도 지방의 산채비빔밥은 나물 종류도 많고 특히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새싹비빔밥이 유행이라고 한다. 별다른 재료가 없을 때는 콩나물비빔밥이나 무생채나물, 김치를 송송 썰어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비벼도 아주 감칠 맛이 있다. 비빔밥, 하면 또 색다른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도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동네로 이사를 갔었다. 부잣집 외동딸로 결혼해서 고생을 모르시던 엄마와 온 가족의 무게를 양 어깨에 짊어지시고 고뇌하시는 아버지, 사춘기의 스트레스를 온통 손아래 동생인 나에게 푸는 언니도 아랑곳 않고 나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대위의 딸들처럼 새로운 환경이 신기하여서 해방감을 맛보며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싱아와 칡뿌리를 씹었다. 햇볕에 그을어 가무잡잡한 시골아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해서인지 풍채들도 좋았다. 얼굴이 희고 체구가 작은 나를 신기하게 여기며 항상 데리고 다녔다. 한 번은 학교 화장실에 ‘최덕희 사랑한다’라고 씌어있는 것을 한 아이가 발견하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조숙한 시골아이들 사이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던 것 같은데 처음 당하는 나로서는 당황하고 무섭기까지 해서 풀 뿌리를 뜯어다가 빡빡 문질러 대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어쨌던 간에 일년 반 정도의 전원생활은 나의 일생 중 중요한 시기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도 지금에 와서야 느끼게 된 일이다. 그 해 겨울, 교실 중앙에는 커다란 난로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수업 전에 학교 뒤 야산에 올라가서 땔감을 주워왔다.
활활 불꽃이 타오르면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서는 김이 폴폴 오르고 구수한 보리 향이 온 교실에 퍼졌다. 아이들은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어 난로 위에 척척 올려 놓기 시작한다.
양은이나 쇠로 만든 커다란 도시락 안에서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김치 익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당번 남자아이들이 위에 있는 도시락과 바꾸어 놓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저 마다 도시락을 들고 흔들어 대느라 열심이었다. 누런 보리밥에 멸치, 흰 쌀밥에 발그스름한 총각김치. 내용물은 달라도 후후 불어가며 먹고는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입가심을 했다. 혹시 그 것이 요즈음 한식당에서 인기 메뉴인 돌솥비빔밥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비빔밥은 샌드위치나 김밥처럼 간편하게 들고 다니며 먹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제는 항공회사 기내식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비빔밥을 먹기 위해 꼭 K항공을 이용한다는 미국인도 있었다. 김치와 불고기, 잡채가 그들의 입맛에 변화를 주었듯이 비빔밥도 잘 개발하여 국제무대에 내세워봄은 어떨지. 캘리포니아롤처럼 김에 말던지 밀전병으로 싸서 간편하게 들고 다니며 먹을 수 있게 메뉴를 개발해 봄직도 한데… 커다란 양푼 같은 세상에서 각자 개성이 다른 사람들을 쓱쓱 비벼 자기를 죽이고 맛과 향의 조화를 이루어주는 고추장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한 방울 똑 떨어뜨려야 비로소 만족할만한 참기름 같은 존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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