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04. 미안, 죄송, 그리고 유감

서 량 2010. 4. 12. 14:02

 당신은 1970년에 전 세계를 휩쓴 영화 'Love story'에 나온 유명한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 are sorry"--사랑이란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 후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라는 곡이 1976년에 히트를 쳤고 그 감미로운 노래는 요즘에도 심심찮게 FM 방송에서 나온다. 1982년에 전 미국이 열광했던 'Chicago''Hard to say I'm sorry'는 또 어떤가. 이렇듯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말이나 노래는 시대를 훌쩍훌쩍 초월한다.

 

 미안하다는 것이 뭐길래 이렇게 야단법석인가. 우리 또한 송대관이 <사랑해서 미안해>에서 무드를 콱 잡고 김건모도 <미안해요>를 열창한다. 요사이 연인들 사이에 '고미사'(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가 유행어가 생겨날만도 하다. 

 

 미국인들은 남과 몸이 부딪치거나 했을 때 'Excuse me'라 밥 먹듯이 말한다. 반면에 캐나다 사람들은 대개 'Sorry'라 한다.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 들을 때도 우리 말로 '?' 하는 뜻으로 뉴욕에서는 'Excuse me?'라 어미를 높이고 캐나다 밴쿠버에서는 'Sorry?'하며 말끝을 올린다. 그래서 성미 급한 뉴요커들은 캐나다 사람이 'Sorry?'라 했을 때 'What for?' (뭐가 미안해?)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싶어 한다.

 

 'excuse' 13세기 초부터 고대 불어와 라틴어에서 '비방()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의미였다. 당시에는 사람들끼리 몸이라도 부딪치면 한쪽이 다른 쪽에서 화를 벌컥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던 모양이다. 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생겨난 말이 '욕하지 말아 주세요'에 해당하는 'Excuse me'. 그 말이 정식으로 '실례합니다'라는 뜻으로 변화한 것은 16세기 초였다.

 

 양키들의 장례식에 가 본 적이 있는가. 상을 당한 사람을 포옹하면서 당신은 'I am sorry'라며 속삭였을 것이다. 한 사람이 죽었기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길래 당신은 미안해 했던가.

 

 'sorry'는 고대영어로 '속상하다' 혹은 슬프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그 본래 뜻의 잔재가 'sore throat(쓰라린 목?)' 혹은 'sorrow(슬픔)'이라는 현대어에 역력히 남아있다. 그래서 당신이 양키 상주에게 'I am sorry'라 했을 때는 당신이 망인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해서 미안하다는 뜻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마음이 슬프다는 뜻이다.

 

 미안(未安) '남을 대하기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라는 한자어다. 마음이 불편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크게 육중하거나 콧날이 시큰해지는 표현이 아니다. 약간 뉘앙스가 다른 말로서 '유감스럽다'는 말도 있지만 어딘지 좀 건방지게 들린다. 절대로 한국인들에게 미안해 하지 않는 안면이 가죽구두보다 두터운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말이다.

 

 한국 티브이 연속 드라마에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에서 며느리가 사소한 실책을 범했을 때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절대로 '미안합니다'라 하지 않는다. 젊음이 풍만한 새색시는 눈을 곱게 내리깔고 꼭 '죄송합니다'라 한다. 며느리는 사과를 할 때도 예의범절이 있어야 하느니라.

 

 죄송(罪悚)하다는 말은 '허물 죄' '두려울 송', 즉 자기가 지은 죄를 스스로 두려워한다는 아주 처절한 의미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하늘이 두 조각이 나더라도 '유감스럽습니다'라 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말의 뉘앙스를 전혀 모르는 맘씨 좋고 머리 나쁜 양키 며느리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거야 예외로 쳐야겠지만.

 

© 서 량 2010.04.11

-- 뉴욕중앙일보 2010년 4월 14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