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구차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었다.
이 때만큼은 솔직하게 있는 대로 자기 표현을 하는 Y가 부럽기도했다.
그녀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난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강했었다.
인천의 작은 동네에서 터가 넓고 근사한 정원을 가진 일본식건물에 사는 나와 언니는 동네아이들에게는 공주와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학교에서는 육성회장으로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다니는 엄마 덕에 선생님들께도 특별대우를 받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나의 얼어붙은 사춘기는 바람구멍이 숭숭 뚫렸다. 고슴도치처럼 털을 뾰족하게 곤두세우기도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범하게 넘기면서 열등감과 우월감을 넘나들며 방어벽을 견고하게 쌓아갔다.
결혼을하고 아이엄마가 되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남들에게는 최대한으로 좋은 모습만 보이려 애썼다.
얼마 전부터 성경책 글씨가 흔들려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놀라며 “당신도 이제 돋보기를 써야 하는거 아냐?” 했을 때 애써 아닌 척 눈을 꿈뻑거리며 이른 아침이라 피곤해서 눈이 잘 안 떠진다고 얼버무렸다. ‘노안’이라든가 ‘갱년기’라는 말은 내가 여자로서도 인간으로도 점점 쓸모없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인정하기가 싫어서 모르는 척 외면해 왔다.영어만해도 그렇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영어울렁증이 있었다. 그 놈의 영어 때문에 내 인생에 얼마만큼의 마이너스가 있었는지를 가늠한다면 밤잠을 안자고 영어사전을 통째로 달달 외우기라도 할텐데…고등학교때부터 영어과목은 나의 콤플렉스였다.
다른과목에서 A나 A+를 받아도 영어과목에서 떨어져서 B+밖에 못 받을 때도 있었다. 이민생활 10년이 되어가면서 영어회화만 어느 정도 가능했으면 내가 원하는 전문분야에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될 뻔한 일도 몇 번 있었다. 그 때마다 영어를 배워야한다고 여기 저기 쑤시고 다니다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을 몇 번이나 떠올리며 발등을 찍었다. 영어를 못해도 전혀 사는데 지장없다는 팰리세이즈 팍에 살면서 한인교회에 다니며 워낙 낙천적인 기질까지 있다보니 아직도 그 타령이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이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쓰는데 아이들 말은 워낙 빠른데다 토막영어여서 더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의연하게 웃거나 자연스럽게 넘기면서 ‘언젠가 망신을 당하는 날이 있겠다’ 했는데 드디어 그 날이 오고 말았다.
그 것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문학교실에서 딕 알렌의 번역시를 공부하다 ‘transitional generation[전이세대]’가 나왔다.
글자가 흔들리며 T와r이 겹쳐져 U로 보이며 자세히 보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대충 얼버무려 엉뚱한 발음을 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그게 아니라고 정확한 발음을 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것이 한글이었다면 누구나 잘못 보았겠지라고 생각하고 넘겼겠지만…
더 바보같았던 것은 눈의 초점을 맞추어 다시보고 제대로 읽었으면 될 일을 당황했을 때의 습관처럼 눈앞이 하얘지며 그 다음으로 넘어간 일이다.
아무리 내가 중고등학교 6년에 입시학원 1년, 대학교 교양영어까지 놀고 먹고 연필을 굴렸어도 그렇지 그 정도 단어조차 읽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고 어디에 대고 변명을 해야한단 말인가? 유구무언의 상황이었다.
머리 뒷꼭지가 계속 뜨뜻한 것을 감추며 집에 돌아와서 딸아이에게 말을 했다.
엄마의 부족함을 늘 보면서 덮어주고 이해해 주는 나의 분신이기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솔직해 질수 있는 하나의 대화상대로 성장한 딸에게…
“엄마, 내가 언젠가는 그런일이 있을 줄 알았어.그러니까 평소에 영어공부 좀 꾸준히 하지”
깔깔 웃는 딸의 얼굴을 보며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처방전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처방 1. 엄마가 잘 쓰는 글로 변명을 늘어놓기
2. 영어학원 수강료 나에게 주고 오늘부터 당장 배우기
3. 돋보기 살짝 살짝 쓰기
아직도 내가 가장 자존심을 세우려 기싸움을 하고 있는 남편의 자는 머리맡에다 대고 가만히 속삭인다. ‘ 나, 돋보기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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