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글동네/수필

가을과 친정 / 최덕희

서 량 2009. 10. 15. 07:18

가을과 친정

 

     최덕희

 

    가을햇살을 받아 활짝 웃고 있는 호박꽃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을 처음 알았다.

가느다란 넝쿨손으로 옆집 담을 성큼 성큼 딛고 올라가 회색의 칙칙함을 밝은 초록으로 도배하기 시작했다. 여름 내 황금빛 꽃잎 뒤에 동그란 애호박을 매달아 조롱 조롱 늘어뜨리더니 보름달같이 부풀어 오른 누런 박덩이를 지붕 위에 올려놓음으로 멋진 벽화를 마무리지었다. 자연은 자기와 교감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는가 보다.

 내 방 창가에서 내려다 보이는 가을 정경은 각박한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남편은 잔설이 채 가시기도 전 2월 말부터 잔디밭을 파헤쳐 거름흙을 사다 섞고는 몇 번이나 뒤엎었다. 호박과 오이 구덩이는 깊숙하게 파서 거름을 듬뿍 집어 넣고는 발효시켰다. 4월이 지나 흙이 제법 보슬 보슬 말라 거무튀튀한 색을 띄울 무렵 돌덩이를 고르고 작은 골을 파서 상추, 쑥갓 씨를 솔솔 뿌리고 흙으로 덮었다. 한국마켓에서 오이, 가지, 고추모종을 섞어서 한 모판을 사다가 오종종하게 심어놓았다. 다음 날 동틀 무렵 남편은 또 잔디밭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일자밭이 기역자가 되고 니은에서 디귿자로 영토를 확장해 갔다.

옆 집 아파트에 사시는 할아버지께서 보다 보다 답답하셔서 훈수를 시작하신거다.

늘어난 밭에 고추 모종을 간격을 띄워 다시 심고 작년에 떨어진 깻잎싹이 난 것을 모종삽으로 떠다 드문 드문 모종했다.

상추잎들이 제법 식탁에 오를 만큼 넓적해 지고 조롱 조롱 방울 토마토들이 달리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나 보다. 어둠이 걷히기 전,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히끄무레한 창가에 한 쪽 팔꿈치를 괴고 텃밭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의 작은 정원은 마음의 안식과 함께 푸짐한 웰빙식탁을 제공해주었다.

 겨우 내내 땅 속에서 뿌리로 번식해 온 돌미나리와 참나물은 이른 봄부터 무성하게 자라 봄내음을 솔 솔 뿌리고 있다.

  잔디밭을 망친다는 민들레잎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은 뒷뜰에서 종종 따다가 상추, 쑥갓과 함께 쌈으로도 먹고, 살짝 데쳐서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조물 조물 무치면 쌉싸름하면서 입맛을 돋구어 주었다.

물을 자주 주면 야채들이 더 빨리 자랄 것 같은 마음에 아침 일찍 나가서 긴 호스를 집어들면 옆집 할아버지께서 창문으로 내다보시다 얼른 따라 나오신다.

 ! 새댁, 물 많이 주지 말어. 뿌리가 썩는다니까…’

마치 며늘아가에게 하듯 정겹게 호통을 치시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몰래 물을 주려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멋적게 웃는다.

 해가 퍼지기 전에 나가서 상추잎을 한 잎 두 잎 정성스레 뜯는다.

오이 넝쿨 사이로 어제 엄지손가락만하던 놈이 밤새 얼마나 컸나 눈대중으로 재어보기도 하고, 휘어질 듯한 토마토가지를 나무에 기대어 묶어주기도 한다.

 한 여름 땡볕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팔 다리는 스프레이를 뿌려도 물것에 물려 툭 툭 불거져 올랐다. 동그란 애호박은 호박찌개에 넣는다고 막내동생이 제일 좋아하고 미나리는 바로 밑의 제부가 고향생각하며 즐겨 찾는다.

 가지는 달리기가 무섭게 언니와 남편이 경쟁하듯 찾아서 내년에는 더 많이 심어야할 것 같다. 친정엄마가 좋아하시는 꽃상추는 7월에 한 번 더 심었는데 조금 늦은 감이 있다. 남편은 농사기술을 더 익히고 비닐하우스를 만들겠다고 한다.

아이구! 이만하면 족하니 더 벌리지는 말아요. 흘기면서도 내년에는 찰옥수수를 심었으면 좋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나도 참 못말린다. 우리집에서 가족모임이 있던 날, 막내여동생이 보따리 보따리 몫지어 놓은 것을 집어들며 꼭 시골 친정집 다녀 가는 것 같네하고 환하게 웃었다.

친정, 얼마나 포근하게 와 닿는 말인가?

자연의 산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적은 것을 나누어 주고 큰 기쁨으로 되돌려 받는 이치를 알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