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랜드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었다.
유치원과 한국학교에서 늘 아이들과 같이 호흡하고 동심의 세계에서 살아서인가, 아니면 누구 말대로 정말 내 정신연령이 유치원 수준이라서인가. 이번 재미한국학교 교사학술대회가 플로리다라는 것을 알고 정원이보다 내가 더 좋아했다. 올랜도에 디즈니랜드를 모방한 디즈니월드가 있기 때문이다.
딸이 한국어 기초반을 맡고 오후에는 전공인 미술반 지도까지 하게 되면서 나는 때때로 미처 몰랐던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고는 내심 놀라고 흐뭇하기도 했었다. 재작년 미시건 교사학술대회에서 내가 유치부 강의를 하게 되자 정원이는 교육자료를 파워포인트로 멋지게 만들어 주었고 강의시간에 동영상 촬영까지 해 주었었다. 이렇듯 든든한 딸아이지만 우리는 잘 다투고 서로 삐치기도 잘했다.
플로리다에 도착하여 세미나 기간 동안은 서로 의기투합했다. 문제는 관광을 하면서부터였다. 9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불쾌지수가 높아서인가? 정원이는 계속 투덜대며 불평을 했다.
신데렐라의 성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 하자 더워서 사진 찍기도 귀찮다고 찡그리고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 피터팬, 신데렐라, 백설공주등이 펼치는 뮤지컬도, 긴 행렬의 퍼레이드도 이젠 나이를 먹어서인지 별 감흥이 없다고 하며 내 기분도 다운시켰다. 너도 친구들하고 왔으면 더 재미있었겠지, 에이, 다시는 너랑 둘이는 안 다닌다. 속으로 다짐을 하며 터덜거리고 다니는데 갑자기 우르릉 쾅 천둥소리가 나더니 양동이로 쏟아 붓듯이 세차게 비가 내렸다. 하루에 한 번 정도 소나기가 오는데 한 시간 정도면 그친다고 가이드에게 미리 정보를 얻었기에 근처 레스토랑으로 대피했다.
빗줄기가 조금 약해지자 흰색, 주황색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시간을 아껴서 한 군데라도 더 구경할 욕심에 가방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갔다. 비에 씻긴 나무들은 더 푸른빛을 청청하게 발하고 구름 속에서 나온 햇살은 다시 화살촉같이 강렬한 빛을 쏘아 보냈다. 젖은 머리는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김이 올랐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킥킥 웃었다. 우비를 벗어 들고 발목으로 물살을 가르며 손을 잡고 걸었다. 찰랑이던 물은 금방 배수구를 찾아 빠져 나가고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말끔한 동화의 나라에서 우리는 친구처럼 다정하게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고 스티커 사진을 찍었다.
미니마우스, 동물모자, 커다란 햄버거모양의 모자들을 번갈아 쓰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치즈’, ‘김치’를 연발했다. 인공동굴 속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자 백설공주와 난장이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성과 신기한 목마등 인형들의 춤과 노래에 정말 우리가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빠져 들었다.
오후 8시쯤 되자 사람들이 신데렐라 성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뉘엿 뉘엿 해는 저물어가는데 오색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이며 퍼레이드 행렬이 몰려왔다. 여기저기서 쉴새 없이 카메라 후레쉬가 터졌다. 와! 낮에 하던 것보다 짱 멋있다!
그 때 신데렐라 성 쪽에서 따발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폭죽이 터졌다 . 벌써 캄캄해진 하늘을 아름답게수놓는 저 불꽃, 그 속에 여섯 살 어린 정원이의 행복한 얼굴이 언뜻 언뜻 보였다. 까르르 웃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건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바닥에 우비를 깔고 털썩들 주저 앉았다. 낮시간 내내 하늘빛을 띄고 있던 성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분홍색으로 바뀌었다가 주황색, 초록색 무지개빛으로 계속 우리의 눈을 현란하게 유혹했다.
그날 밤 오랜만에 우리 모녀는 침대 한 개를 비워 놓고 둘이 꼭 끌어안고 잤다. 숙면을 취해서인지 아침이 되자 가쁜한 몸으로 일어나 씨월드로 향했다. 남극에서 열대지방으로 오가며 고래쇼와 펭귄, 물개, 거대한 수족관을 구경하고 훈제된 터키다리를 사서 먹으며 돌아다녔다.
평소 우리는 죽이 잘 맞는 모녀였다. 정원이는 음악을 듣다가도 엄마의 취미에 맞을 만한 클래식이나 잔잔한 발라드 풍, 때로는 좋아하는 가스펠송을 CD로 만들어 주었다. 친구들과 돌아다니다 싸고 맛있는 레스토랑이나, 아이스크림 집등을 알게 되면, 다음에 꼭 엄마랑 같이 가자고 말을 했다. 링컨센터로 발레공연도 같이 보러 갔다. 식성도 취미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가정에서 소소한 일을 의논할 때는 우리 둘이서 민주주의 원칙을 들먹이며 두 표를 던지면 남편은 모녀가 한 통속이 되어서 자기가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일찌감치 두 손 들고 항복을 했다. 하지만 때론 지독하게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에게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답답한 사고방식의 잔소리쟁이 엄마로 낙인 찍히는 것이 억울해서, 정원이는 자기생각을 앞세우는 이기적이고 절제하지 못하는 아이로 몰아부치는 엄마가 야속해서 지지 않으려 했다.
그럴 때 남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양 쪽을 회유해서 자기 편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얼마 안가서 다시 둘이 짝짝궁이 되어 남편을 공격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정원이가 던진 한 마디가 내 귀에 계속 맴돌았다. 언젠가 보니 내가 엄마랑 똑 같은 행동을 하고 있더라구…
내 몸 속에 둥지를 틀고 탯줄로 연결되어 10개월을 살고 나온 하나 뿐인 나의 분신. 스무살이 지난 지금까지도 슬그머니 내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려는 내 아이에게 때때로 실망하고 분노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기대가 크기 때문일까?
아빠들은 딸에게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을 18세가 되면 같이 춤을 추는 것으로 꼽는다. 엄마들에게 이제는 자식들이 다커서 부모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딸과 친구같이 연인같이 다정하게 때로는 싸우며 여행을 하라고 권한다. 둘 만의 오봇한 시간 가운데 서로의 모습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며 그 단점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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