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수다, 담론, 게시

|잡담| 비내리는 추석

서 량 2009. 10. 5. 12:36

 

 올해는 이상하게 추석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작년엔 추석이 실감이 났느냐 하면 작년에도 그랬지만. 솔직히 어렷을 적에는 추석하고 정월 대보름을 혼동했었지. 킥킥. 이건 별로 지성인이 될만한 자질 부족이었다고 말하면, 당신도 덩달아 킥킥 웃을래?

 

 하필이면 미국 날짜로 추석날 대학교 2년 후배의 딸이 결혼식을 한다 해서 한 시간 정도 어디 이상한 경치 좋은 곳으로 운전을 해서 갔다. 그곳은 바닷가였는데 날씨가 흐렸어.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질질 내리더라. 잠깐 샛길로 빠져서 와이트 플레인즈, 내가 사는 동네보다 약간 북적거리는 소도시 악기점에 들렸지. 무슨 속셈이었는지 처음에는 스스로 분명치 않았지만. 

 

 웃기지. 소프라노 색소폰은 워낙 클라리넷처럼 똑바로 막대기 모양으로 생겼지, 왜. 당신 그거 알아? 케니 지(Kenny G.)도 막대기 모양 소프라노 색소폰을 불잖아. 그런 시시한 상식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아요.

 

 하여간 그 악기점에 들어갈 때쯤은 비가 좀 거세게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얼마전에 눈독을 들였던, 테너나 알토 색소폰, 내 블록 아이콘처럼 주둥아리가 클라리넷처럼 땅을 향하는 게 아니고 하늘 쪽을 보며 위로 꼬부러진 색소폰, 그렇게 주둥아리가 정스럽게 꼬불아진 소프라노 색소폰이 거기에 있었거든. 전체 길이가 내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 정도 밖에 안되는 그 앙징맞은 악기를 덜커덕 사버렸다. 게다가 악기 빛갈이 전통적인 노랑색이 아니고 약간 검정색이 도는 은빛인 거 있지. 악기점 점원에게 농담으로 "이 색소폰이 참 섹시해 보이네." 했더니 지가 보기에도 그렇다는 거야.

 

 20년 전쯤에 장만한 막대기 노랑색 소프라노 색소폰이 있긴 있는데 얼마 전부터 소리도 부실해지고 바람도 새고 해서 속으로 은근히 걱정을 해왔거든. 근데 그 꾸불텅한 소프라노 색소폰을 잠깐 불어 봤더니 음정이 아주 견실하고 튼튼한 거야. 어쩌니. 이 나이에 음정이 불안정한 건 딱 질색이란 말이지. 그래서 나 추석날 불쑥 충동구매를 해 버렸다.

 

 집에 오자마자 새로 산 악기를 불어 봤지. 좋아. 소리가 너무나 좋아. 소리내는데 힘이 별로 안들고. 기분을 내서 한 대여섯 시간을 계속 불었지.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도 불었다. 그러다가 밤 열시 가까이 아, 참 오늘이 추석이지 하며 창밖을 내다 본 거야. 보름달을 커녕 하늘이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라. 추석날 밤하늘이 캄캄했다는 일은 사실 살아가는데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야. 근데 어쨋건 휘영청 밝은 달밤에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그런 한국인의 전통적인 폼을 이번에도 또 못 잡았네.

 

© 서 량 2009.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