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87. 미스 킴 라일락

서 량 2009. 8. 18. 15:48

2008년에 제작된 미국영화 'What Happens in Vegas'를 보았는가. 그 영화는 수년 전부터 불경기에 접어든 라스베가스가 갑남을녀 양키들을 유혹하는 광고 문구, 'What Happens in Vegas, stays in Vegas (라스베가스에서 생긴 일은 라스베가스에 머뭅니다)'의 처음 부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적인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된 두 방탕한 뉴욕출신 남녀의 엉뚱한 애정행각을 묘사한 영화를.

         

뉴욕 사람들은 성미가 급하기로 전 세계에 소문이 나있다. 그래서 'in a New York minute'라는 근래 슬랭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후닥닥, 빨리'라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그나저나 성미 급하기로는 우리 한국인들도 뉴요커들의 뺨을 친다. 오죽하면 맨해튼 한인타운 근처에서 일하는 양키들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번번히 하는 말이 '빨리빨리'. 어쩌면 뉴욕은 우리들 체질에 적합한 도시일지도 모른다.

 

침착하고 평온한 생을 받드는 불교인들을 빗대어 지칭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우리말의 유래를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야외에서 하는 불법을 설교하는 자리라는 뜻에서 유래한 냉소적인 말로서 비생산적으로 떠들썩하기만 하고 별로 영양가가 없는 상황이라 하는 의미. 일부 지식인들은 '야단법석'을 한자로 '惹端法席'으로 번안해야 된다고 하지만.

  

1960년도 초반부터 양키들 입에 오르기 시작한 'Chinese fire drill'이라는 속어가 있다. 직역하면 중국인들의 화재훈련이라는 뜻. 우리말로 '호떡집에 불 났다'는 말과 기가 막히게 일치한다.

 

맨해튼에서 종종 부닥치는 그리스 식당 간판 'It's Greek to me'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 될 것 같다.

 

기원전 9세기에 고대 남부 이태리는 처음으로 희랍의 침략을 받는다. 그들이 못 알아 듣던 '그건 희랍어입니다'라는 절실한 고백은 상대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뜻이 돼버렸고 모든 양키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그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엽이었다.

 

이태리인의 선조 로마사람들이 유럽의 패권을 잡았던 시절에는 라틴어가 판을 쳤다. 그래서 'Do as Romans do when you are in Rome (로마에 있을 때는 로마인들처럼 행동하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다.

 

쉐익스피어의 '햄릿' 1 4장에서 'Something is rotten in the state of Denmark'라는 대사가 나온다. 우울증이 극심했던 덴마크의 왕자 햄릿의 조국이 썩어간다는 의미로 쓰였던 말이 요사이는 '무엇이 수상하다'는 의미가 돼버렸다. 성미 급한 양키들은 'in the state'를 빼먹고 그냥 짧게 'Something is rotten in Denmark'라 한다.

 

프렌치? 왜 불란서 사람들은 입이 그리도 거칠었는가. 그러길래 쌍소리를 해 놓고 미국사람들은 'Excuse my French (입이 거칠어서 죄송합니다)'라 하지 않는가 말이다.

 

백악관 앞에 풍요롭게 심겨있는 예쁘고 향기로운 라일락 이름이 'Miss Kim Lilac'이다. 1947년에 어느 양키 군인이 북한산 근처에서 채집해서 미국으로 가져온 꽃  '미스 킴 라일락'. 그 정겨운 이름을 들으면 우리의 한국 청년 양용은이가 엊그제 타이거우즈를 꺾고 세계 골프의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만큼이나 어깨가 으쓱해진다.  

  

© 서 량 2009.08.18

--뉴욕중앙일보 2009년 8월 19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