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86. 실없는, 혹은 진지한 농담

서 량 2009. 8. 3. 22:13

 여름이 콧잔등을 간질이는 요즈음 당신은 불현듯 학창시절로 돌아가 '피타고라스'의 정의를 기억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직각삼각형의 직각을 낀 두 변의 제곱을 합치면 빗변 길이의 제곱과 같다는 것!

 

 피타고라스가 수비학(數秘學: numerology)에 기원 전 6세기에 심취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건 마치도 위대한 과학자가 요술을 믿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경악 같은 것. 이태리 남부 조그만 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과 음악을 가르치던 그는 학생들에게 노트 필기를 금지하는 둥 이상한 버릇으로 소문난 기인이었다.

 

 '수비학'은 숫자의 비밀을 연구하는 학문. 지금껏 과학적 근거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시시때때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숫자에 대한 관찰과 기록을 추종하는 수상한 연구분야다.

 

 요한계시록은 예수에 대적하는 'antichrist'를 대변하는 숫자 666번을 13장에서 상세하게 명시한다. 악마의 상징은 '666'이라는 숫자에 있다며 우리 같은 소시민들을 공포에 부들부들 떨게 한다. 그레고리 펙이 양심적인 아버지로 출현하여 악마로 환생한 자기 자식을 죽이는 영화, 'The Omen'(1976)'에서 음산하게 부각됐던 숫자.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라. 우리는 지금 한가로이 그레고리 펙을 운운할 때가 아닌 것을. 666은 성경학자들이 이미 당신과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개념이었던 것을. 666은 인류 역사상 기독교인들을 처참하게 대량 학살한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를 지칭한다는 이론이 가장 강력하다는 고증을. 자고로 멀쩡한 사람들을 죽이고 박해한 악랄한 인간들 중에 그 금메달 상은 '네로'에게, 그리고 아깝게도 은메달일랑 콧수염이 졸렬한 독일의 '히틀러'에게 수여되는 것을.

 

 1961년도에 'Catch 22'라는 제목으로 가상적인 전쟁소설로 양키들 언어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조셉 헬러(Joseph Heller)를 기억하는가. 'catch 22'는 양키라면 누구나 알아듣는 관용어로서 이래도 지고 저래도 지는 상황을 뜻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애용하던 표현, '윈-윈'과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공군에서 폭격기 비행 명령을 당한 졸병이 '저는 정신이상이 있어서 비행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한다면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정상인 취급을 받아서 비행을 해야 되고, '예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면 물론 비행을 해야 되기 때문에 이래도 저래도 난경에 빠지는 입장이라는 뜻. 그렇게 'catch 22'는 비극과 희극을 잘 융합시킨다.

 

 예수가 그 생애의 마지막 날 어느 금요일에 최후의 만찬을 할 때 13명이 모였다 해서 19세기 이후로 어느 달이건 13일에 해당되는 금요일 날은 저주 받은 날로 판명을 받는 미신 때문에 당신과 나 또한 입때껏 오들오들 떨면서 사는 형편이다.

 

 불교에서 설파하는 12인연법은 또 어떤가. 태초에 무명(無明)이 있었다는 가설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 다음에 어떤 움직임(行)이 있었고, 이름(名), 기타 등등이 발생했다는 설명을 하자면 입만 아플 뿐, 차라리 너희들끼리 알아서 공부를 하던지 말던지 해, 일갈하고 말을 끊고 싶은 심정은 또 무엇인가.

 

 36계 줄행랑? 적과 싸우다가 힘이 딸리면 들입다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중국 병법의 막중한 교훈이다. 그런 33한 요령을 모르면서 77맞게 살다가 저 88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에너지도 제때제때 발휘하지 못한 채 99한 핑계만 늘어놓는, 지금처럼 지루한 장맛비 내리는 8월 초에 하는 실없는 농담이다.

 

© 서 량 2009.08.01

--뉴욕중앙일보 2009년 8월 5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