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58. 바보 천치

서 량 2008. 9. 19. 21:45

 바보 혹은 천치를 의미하는 영어의 'idiot'는 14세기경 희랍어로 'idiotes'라 했는데 원래는 '평민' 혹은 '개인적인(private)'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당시에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았고 사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차별을 받았다. 우리의 선조들도 국록을 받는 양반과 개인 영업을 하는 상인들을 다른 눈으로 보았다.

 

 고대불어에서 'idiote'는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라틴어에서도 'idiota'는 프로페셔널이 아닌 갑남을녀를 지칭했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idioma'라는 단어가 파생됐는데 관용어나 숙어라는 뜻이었다. 현대어로 'idiom'이라 한다.  공인과 개인을 차별하는 사고방식이 아직도 군대에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계급이 높은 장교를 'officer'라 부르고 소위 일등병이나 이등병 같은 졸병들을 'private soldier'라 일컫는다. 작전지휘를 해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장교들은 공직에 속하고 일선에 나가 몸으로 총탄을 막아내는 졸병들은 개인적인 노동을 하는 것이다.  'officer'는 당신이 출근시간에 조바심을 내면서 과속운전을 하다가 경찰이 울긋불긋한 회전전등을 켜고 당신을 정지시켰을 때 'Good morning, officer!' 하는 바로 그 말로서 '공무원'이라는 의미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에 있는 관료들이 평민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언어의 변천과정을 앞장서가는 역할은 'idiom' 혹은 'idiomatic expression(숙어적 표현)'이 맡아 주관함을 어찌하랴. 우리 옛말에도 민심이 천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무한한 상상에 빠뜨리거나 조작적인 배경 웃음으로 시청자를 멍청하게 만드는 TV를 우리말 속어로 '바보상자'라 하는데 이것은 1959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영어의 'idiot box'의 직역이다. 그런데 1487년에 'idiocy'는 '예언자'나 '예언'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당신이 TV 화면을 종횡무진으로 리모컨으로 통솔하는 요즘보다 500여 년 전에 상상력이 지나치고 멍청한 사람들이 인류의 장래와 시대를 늠름하게 예언했다는 사연이다.

 

 'fool'은 1275년경 고대불어의 'fol(미친 사람)'에서 유래했는데 현대 영어로 바보라는 뜻이다. 같은 어원을 가진 라틴어의 'follis'는 풀무(바람주머니; 허풍선이)라는 의미였다. 현대 슬랭으로도 'airhead'는 '멍청이'라는 뜻. 내친 김에 얼간이나 바보라는 뜻의 영어로 'bird head' 'meathead' 'pinhead' 'noodle head' 'chicken head' 'pumpkin head' 따위가 있는데 바로 우리말의 돌대가리, 새대가리, 닭대가리 등등에 해당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하시키는 데는 양키들이나 우리나 역시 상대의 머리를 그 표적으로 삼고 있다. 권투선수들이 상대방의 머리에 치명타를 가하고 싶어 하듯이.

 

 우리말의 '바보'는 임신한지 8개월 만에 나오는 팔삭둥이에 해당되는 옛말 '바사기'의 약칭인 '바'에 울보, 먹보, 털보, 뚱보 할 때 쓰는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접미사 '보'를 첨가해서 나온 말이다. 조산아들의 지능지수가 낮은 확률이 많은 통계학적 관찰에서 생긴 말이니 가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일이다.

 

 'idiot'나 'fool'과 비슷한 의미로 'stupid'가 있는데 중세기 불어의 'stupide'에서 유래된 말로 정신적으로 느리다는 뜻. 30마일의 속도 표시가 있는 일차선 도로를 앞차가 15마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는 생각을 해 보라. 평소에 성미가 차분한 당신일지라도 저도 모르게 속삭이듯 이렇게 내뱉을 것이다. “You, stupid idiot!”

 

© 서 량 2008.07.06
--뉴욕중앙일보 2008년 7월 9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