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래 감독이 제작한 디워(Draggon Wars)가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엊그제 뉴욕 북부 동네 극장에 가서 그 영화를 봤다. 이무기가 여의주(如意珠)를 입에 물고 용이 되어 승천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여의주는 실눈을 지긋이 뜬 부처가 엄지와 검지로 그리는 구슬 모양이다. 소위 동양의 사상을 대표하는 곡선의 상징이다. 양키들 건축이 하나같이 직사각형임에 반하여 우리의 경복궁과 창덕궁의 추녀가 그리는 부드러운 선을 보라. 그토록 우리의 사고방식은 둥글고 원활하다.
여의주는 요술을 부린다. 이무기가 여의주를 제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용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참으로 멋진 매직(magic)이다.
‘magic (마술: 魔術)은 14세기 말 희랍어로 ‘예술’ 혹은 ‘기교’라는 뜻이었고 5,500년 전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前) 인도유럽 말로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같은 뿌리에서 온 현대어 ‘might’도 ‘힘’이라는 의미. 똑같은 어원에서 ‘machine’이라는 단어도 나왔다. ‘machine’은 16세기경 불어, 라틴어, 희랍어에서 ‘속임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machine’은 19세기 말에 남녀의 성기를 지칭하는 속어가 됐다. 우리식 발음으로 ‘magic’도 ‘might’도 ‘machine’도 하나같이 ‘마(魔?)’자 돌림이다. 우리들의 성기는 기교를 부리고, 힘이 있고, 속임수를 쓰는 마술적인 올간(organ)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해서 당신은 여의주(如意珠)의 한자를 유심히 관찰해 보라. 여자의 입 모습이 아닌가. ‘여(如)’는 옥편에 ‘같을 여’라 나와있다. 여자의 입들은 ‘같다’는 뜻이렸다.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 때 립스틱 짙게 바른 그들이 입이 너무나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도깨비는 방망이를 들고 다니면서 요술을 부린다. 서구의 요술쟁이들은 늘 지팡이를 들고 다니지. 그래서 영어로 요술방망이를 ‘magic wand’라 한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의 신출귀몰한 수석보좌관을 하던 손오공이 손에 쥔 무기도 여의봉(如意棒)이었다. 이렇듯 손에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 놈들은 대체로 매직의 수준이 낮은 것들이다. 저 오묘한 부처의 설법이 담긴 여의주가 일으키는 기적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막대기의 직설법이 구슬의 완곡한 어휘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남성적인 과격성을 굴복시키는 법이다.
디워(Dragon Wars)는 이무기들이 빚어내는 선과 악의 싸움이었다. 어깨에 붉은 용이 문신 된 스무 살짜리 여자가 품고 있는 여의주를 쟁취하려는 뱀처럼 생긴 양서류(兩棲類)들의 투쟁이다.
14세기 말에 ‘bead(염주)’는 ‘기도(prayer)’라는 뜻이었다. 당시 가톨릭 승려들의 염주는 머리를 박박 밀어붙인 우리 조상 중들이 쓰다듬던 염주나 별로 다른바 없었다. 염주는 염원을 실현시키는 소망이 아롱진 ‘같은 뜻(意)의 구슬’이었다.
‘bead’에서 유래한 흔적으로 지금도 독일어를 쓰는 유럽에 관광을 가면 말끝마다 원주민들이 비테(bitte), 비테, 하는 것을 당신은 들을 것이다. ‘bitte’는 영어의 ‘please’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아쉬운 느낌이 들 때, 그래서 무엇인가 부탁하거나 청원하고 싶을 때, 우리는 불현듯 기도하고, 염주를 만지고, 여의주를 얻고 싶어 한다. 심형래의 이무기가 찬란한 여의주를 입에 물고 너울너울 승천하는 마음으로.
© 서 량 2007.09.17
-- 뉴욕중앙일보 2008년 9월 19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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