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우리말 슬랭, '필(feel)이 꽂히다'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이 이상한 구어(口語)는 영어와 우리말의 조합으로 태어난 혼혈아적인 표현이다. 세상이 급한 세상이라 때로는 아예 '필 꽂히다'라며 조사를 빼기도 하고 강조를 할 때는 '필이 팍팍 꽂힌다'며 힘주어 말하면서 언어생활의 최첨단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아닌가.
어떤 '느낌'이 들었다고 차분하게 말하는 대신에 꼭 그렇게 'f'와 'p'를 분별하지 못하는 영어발음을 재래식 한국말과 교배시키는 우리의 정서가 놀랍고 새롭다. 무엇이 꽂히다니! 얼마나 아플까. 이것은 가령 전신을 새까만 천으로 휘감은 닌자 (Ninja)가 어느날 밤 지붕에서 뒷마당으로 사뿐 뛰어내려 표창이라도 휙! 휙! 던지는 발상인가. 그 뾰족한 흉기는 대관절 당신 몸 어느 부위에 부르르 떨리면서 꽂히는가.
'느낌'의 동사형인 '느끼다'는 기름기 많은 음식이나 사람의 태도가 느글느글해서 비위에 거슬린다는 뜻인 '느끼하다'는 단어와 말의 뿌리가 같다. 그러니까 우리의 감정이란 뱃속으로부터 오는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더럽고 아니꼬와서 구역질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구역질이 나기 때문에 더럽고 아니꼬운 감정이 된다는 이론이다. 감각이 감정을 선행하는 법.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잡으려면 남자의 배(胃)를 잡아라' 하는 이태리 속담도 있지 않은가.
'feel'은 고대영어에서 '만지다(touch)'는 뜻이었다. 고대영어보다 훨씬 이전 5,500년 전에 쓰이던 초기인도유럽어로는 'feel'을 'pal'이라 했는데 '가볍게 때리다'는 의미였다. 이렇듯 양키들은 몸 속의 감각보다 몸 밖에서 오는 자극에 신경을 썼다. 우리들의 '느낌'은 뱃속에서 생기고 양키들의 'feel'은 살갗에서 온다.
아니다. 꼭 그렇게 양키들이 외부적인 자극을 밝히는 인간들만은 아니라는 어원학적 증거도 있다. 차제에 당신과 나는 '감정'이라는 영어단어 'emotion'을 연구하고 분석해 보는 것이 어떨까. 양키들이 13세기부터 쓰기 시작한 동사 'move'의 명사형이 'motion'이다. 'emotion'의 'e'는 'exit'에서처럼 '밖으로'라는 접두어인데 중세 불어와 라틴어에서 'emotion'은 '밖으로 나가다'라는 뜻이었고 17세기 중엽에 그 말이 '감정'이라는 현대적인 의미가 됐다. 'emotion'은 떡시루에서 김이 나듯 몸 속에서 어떤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13세기 말경부터 'move'와 주유소 이름 모빌(Mobil)의 원조인 'mobile'과 'motor'가 하나같이 '움직이다'라는 뜻으로 불어와 라틴어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영어 슬랭으로 'move'는 '서두르다'라는 의미가 생겨난 것이 19세기. 우리말로도 '움직여!' 하면 서두르라는 뜻. 우리의 입버릇인 '빨리빨리!'는 영어로 'Move! move!'하며 뉴욕 악센트로 소리치면 그 뉘앙스가 가장 민첩하게 전달된다.
'필 꽂히다'를 구글(google) 검색해 봤더니 자그마치 1600개에 가까운 항목이 우르르 뜨면서 가죽재킷이며 젖소무늬 가방이며 원피스며 하다못해 동생 약혼녀에게 필이 꽂힌다는 둥, 실로 말초감각적인 웨브사이트 이름들이 눈길을 끈다. 표준말로 무엇에 반하거나 끌렸거나 정(情)이 간다고 해도 얼마든지 좋은 표현을 꼭 이렇게 말해야 직성이 풀린다는데야 크게 할 말이 없노라.
어떤가. 당신도 이토록 거칠고 조잡한 언어습관에 은근 슬쩍 합세하지 않겠는가.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창 밖에서 꾸르륵 꾸르륵 울어대는 저 산개구리들의 합창을 듣노라면 벌써 가을을 예감하는 예리한 필이 팍팍 꽂히지 않는가.
© 서 량 2007.07.22
-- 뉴욕중앙일보 2007년 7월 25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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