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행동인 'eat (먹다)'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 8세기 초엽이라고 문헌상에 나와 있다.
그렇다면 8세기 이전 양키들은 먹는다는 말을 뭐라고 했을까. 그리고 고대의 우리 선조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이것을 먹어라' 하는 의사를 어떻게 전달했을까. 어퍼(upper) 맨해튼의 어느 터키 레스트랑에서 영어를 잘 못하는 웨이트레스가 마침내 주문한 음식을 가져올 때처럼 그렇게 잠자코 코앞에 불쑥 접시를 (밥그릇을) 디밀었을까.
'What's eating you?'는 '뭣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야?'라는 숙어적 표현이다. 16세기 중반쯤 'eat'에 이런 좋지 않은 뜻도 생겨난 것이다. 그때부터 'eat'는 내가 무엇을 먹는다는 것 외에도 어떤 나를 잠식(蠶食)하는 괴로움도 의미하게 됐다. 그렇게 양키들은 먹는다는 것이 호락호락 단순하게 공허를 충족시키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아픈 사실을 집단적으로 발견한 듯하다. 시쳇말로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논리의 비약이 심해서 미안하지만 '먹는다'는 것이 '먹힌다'는 의미라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우리말의 '먹다'라는 뜻을 여러 사전을 찾아가면서 면밀히 조사해 봤다. 흔하게 쓰이는 어휘와 관용어와 심지어는 속담까지를 곰곰이 살폈다.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눈길을 끌었다.
미역국 먹다; 엿 먹다; 물 먹다; 골탕 먹다; 꿀밤 먹다; 콩밥 먹다; 애먹다; 겁먹다; 욕먹다; 해먹다; 빼먹다; 까먹다; 굴러먹다; 떼어먹다; 속여먹다; 날려먹다; 말아먹다; 빌어먹다; 등쳐먹다, 등등. 이런 말들은 참 기분 나쁜 말들이다. 부디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컨셉(concept)들이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내친김에 이런 것까지 들춰내서 좀 뭐하지만 <국어비속어 사전>(김동언 편저: 프리미엄북스, 1999)에 의하면 '먹다'의 속어 첫 번째 뜻이 '여자의 정조를 빼앗다'라 나와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성을 성적으로 클레임(claim)하는 인간의 행위가 어찌 식탁에서 불고기백반이나 상추쌈을 먹는 행위에 비유될 수 있겠는가. 동방예의지국임을 자처하는 우리들이 어쩌다가 종족보존본능을 개체보존본능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말인가.
'그게 정말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라는 표현을 양키들은 '그게 정말이라면 내 모자를 먹겠다' (I will eat my hat if it is true.)라고 한다. 우리의 자학적인 사고방식도 재미있게 들리지만 그들의 발상도 엉뚱하지 않은가.
얘기가 여기에서 그쳤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슬랭으로 'eat somebody'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지적(知的)인 죄악이랄 수 있다.
우리말로 '나는 그 여자를 먹었어' 하면 그 여자와 성교를 했다는 말이지만, 영어로 'I ate her' 하면 그 여자를 구강애무(口腔愛撫: cunnilingus) 해줬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날 잡아 먹어라!' 할 때는 상대방에게 앞발 뒷발 다 들었다고 한탄하는 소리지만, 영어로 'Eat me!' 하면 구강애무를 해 달라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황당무계한 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 제발 당신은 미국에서 살지어다.
미국에서 사사건건 미역국을 먹으면서 밤낮으로 애를 먹으며 눈앞에 사람만 얼씬하면 엿 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살아 온 당신인지도 모른다. 야, 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남을 등쳐먹으면 안 돼! 하며 고함을 쳤던 당신일 수도 있다.
우리말 속담에 <황소 불알 떨어지면 구워 먹으려고 다리미에 불 담아 다닌다>라는 표현은 또 어떤가. 그토록 안타깝게 요행을 기대하면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우리의 의식상태가.
© 서 량 2007.07.09
-- 뉴욕중앙일보 2007년 7월 11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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