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6. 아픔과 정열의 차이

서 량 2007. 8. 31. 12:23

‘아프다’는 사전에 ‘고통(苦痛)스럽다’로 나와있고 옥편에는 고(苦)는 ‘쓸 고’ 또는 ‘괴로울 고’로 풀이돼 있다. 좀 우기자면 ‘아프다’와 ‘괴롭다’는 같은 뜻이다. 전자가 육체적이고 후자는 정신적이라고 분별할 수 있겠지만 육체와 정신은 늘 상통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그놈이 그놈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고대 라틴어로 ‘passus’는 ‘고통’이라는 뜻이었는데, 바로 이 말에서 ‘passion (정열)’이라는 단어가 태어났다. 정열은 아픔에서 생긴다. 정열은 괴로움이면서 그 맛이 쓰다.

 

희랍어에서도 ‘pathos’는 고통이라는 뜻이었는데 이 말은 스펠링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지금껏 현대영어에 ‘비애’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pathos’에서 ‘pathology (병리학)’이라는 의학용어마저 파생됐다.

 

아픔은 병이다. 따라서 정열도 병이다. 인생 그 자체가 키르 케고르의 말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던가.

 

우리말로 정열(情熱)은 ‘뜻 정’에다 ‘정성 열’ 또는 ‘몸달 열’이니 이것은 정성이 지극하여 몸이 달아오른다는 뜻이다. 반면에 서구적인 의식에서의 정열, ‘passion’은 말의 근원이 체온의 변화보다는 차라리 노골적으로 아픔에 중점을 주느니 만큼 깊고 솔직하고 심각한 데가 있다.

 

‘passion’은 영한 사전에 정열·격정·분노(울화통)·연정·애착·열애·고난·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 등으로 나와있다. 맨 마지막에 첨가된 종교적인 의미는 논외로 치고, 이 일곱 가지 인간감정을 유심히 검토해 보시라.

 

‘정열’이 있으면 ‘격정’이 솟고 ‘울화통’이 터지고 ‘연정’과 ‘애착심’이 싹트고 급기야는 ‘열애’에 빠지는 인간의 ‘고난’을 묘사하는, 이것이야 말로 주말 연속극과 진배없는 우리의 일상이 아닌가.

 

아픔과 정열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삶 자체가 아픔이라는 요소를 품은 ‘패키지 딜(package deal)’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울면서 태어났다. 우리는 그 아픔에 반항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영어 속담에도 ‘아픔이 없으면 얻지 못한다. (No pain, no gain)’ 하지 않았던가.

 

‘compassion’은 ‘passion’에 라틴어 접두사 ‘com’이 붙은 단어다. company(회사)나 combine(결합하다)에서 볼 수 있듯이 ‘com’은 ‘같이’ 혹은 ‘함께’라는 뜻을 지닌다. 하다 못해 우리는 옷을 입을 때도 ‘콤비’로 입으면서 서로 다른 색상이 잘 어울리기를 바란다. ‘compassion’은 같이 아파한다는 뜻으로서 ‘동정’이라고 번역한다. 동병상련(同病相憐)과 같다.

 

‘심포니’라는 희랍어는 ‘sym(함께)’와 ‘phony(소리)’가 합쳐진 단어로 함께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sympathy’는 역시 같이 아파한다는 의미다. 우리말의 ‘동정(同情)’이 ‘같은 뜻’이라는 뜨뜻미지근한 의미인 반면에 ‘compassion’이나 ‘sympathy’는 명실공히 ‘아야, 야야!’ 하는 아픔을 같이 나눈다는 아주 적극적인 컨셉(concept)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아픔을 함께 나눌 때 과연 그 보다 더 성스러운 행위가 세상에 또 있을까.

 

고진감래(苦盡甘來)라. 쓴 것이 다하면 달콤한 것이 온다는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하면서 독일의 시성 괴테는 ‘오직 고독한 마음 뿐(None but the lonely heart)’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 ‘슬픔에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 내일을 기다리며 한밤의 캄캄한 시간을 눈물로 지새워 보지 못한 사람, 그 사람들은 알지 못하리라, 무섭도록 신성한 하늘의 권능을’.

 

© 서 량 2006.11.28
-- 뉴욕중앙일보 2006년 11월 29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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