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7. 붙고 떨어지기

서 량 2007. 9. 1. 01:56

 ‘붙다’는 국어사전에 1.서로 마주 닿다 2.의지하다 3.불이 옮아 타기 시작하다 4.밀접히 교제하다 5.(속어)암수가 서로 교미하다, 등등으로 나와 있다. ‘붙다’는 자동사고 ‘붙이다’는 타동사다.

 

 같은 뜻으로는 영어에 'stick’이 있다. 이를테면 1912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슬랭 표현 ‘Stick around!’는 어디 가지 말고 그 자리에 ‘붙어 있으라’는 뜻이다. ‘stick together’는 서로 의지하고 돕는다는 의미다. 이 관용어는 위에 열거한 뜻 중에서 5번이 암시하는 성적(性的)인 뉘앙스가 전혀 없는 말이다.

 

 이렇게 영어와 우리말은 뉘앙스가 엄청나게 다를 때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제법 미남으로 생긴 당신이 어느날 옆집에 사는 한국여자를 찾아가서 ‘우리 붙읍시다!’ 해 보라. 그리고 다음날 그 여자에게 세차게 얻어 맞은 뺨에 손바닥 자국이 벌겋게 난 얼굴로 같은 직장의 미국여자에게 ‘Let’s stick together’ 라고 말해 보라. 그녀는 틀림 없이 양키 특유의 호들갑을 떨면서 ‘Sure, no problem! (좋아요, 그래요!)’이라고 대응할 것이다. 직장에서 서로 돕자는 말이 조금도 이상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들 사이에 한쪽이 언성을 높이면서 ‘야, 한번 붙어 볼래?’ 하면 서로 치고 박고 싸우자는 뜻이 되니까 또한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요컨대 점잖은 한국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붙다’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우리라.

 

 'stick’은 워낙 11세기 고대영어로 ‘막대기’라는 명사였다.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서서 ‘찌르다’ 혹은 ‘쑤시다’라는 동사의 뜻이 파생됐다. 다시 13세기 경에는 ‘붙다’ 혹은 ‘붙이다’라는 의미도 생기고 해서 현대영어에서는 이 세가지 의미가 다 두루두루 쓰이고 있다.

 

 어째서 ‘stick’의 ‘찌르다’에서 ‘붙이다’라는 개념이 나왔는가. 이것은 조금도 어려운 추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이다. 종이를 압정으로 찔러 게시판 벽에 붙이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반면에, 종이 뒤쪽에 풀을 발라서 벽보를 붙이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습관이다. 사교성이 좋은 사람을 우리는 ‘붙임성’이 있다 하고 남의 마음을 콕콕 찌르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인간성이 부족하다 한다.

 

 양키들은 종이를 못을 박듯이 압정으로 뚫어 벽에 부착시키고 우리는 풀로 붙인다. 그들은 서로를 손상시키면서 붙이는 반면에 우리는 둘 다 온전히 보존하면서 접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말의 ‘붙다’는 한번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기가 힘이 든다는 사실을. 압정만 쏙 뽑아내면 종이가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로 떨어지는 반면에 풀로 단단하게 붙인 벽보를 떼어낼 때 그 종이는 갈갈이 찢어져 형체마저 사라지지 않는가.

 

 양키들에게는 서로 붙고 떨어 지는 것이 너무나 수월한 일이지만 우리들은 한번 붙은 후에는 서로 파손되고 상처가 남는 재난이 없이는 결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전래의 신파극이 그랬고 오래 전에 우리를 울렸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 또 그랬다.

 

 80년도 초반에 팝송 ‘Hello’로 히트를 친 흑인 가수 라이오넬 리치 (Lionel Richie)가 불렀던 노래 제목에 ‘Stuck on you (홀딱 반했어요)’가 있다. ‘stuck’은 ‘stick’의 과거분사. 이 말은 참 대단한 슬랭이다. 당신이 양키와 연애를 한다면 어느날 상대에게 ‘I am stuck on you’ 라고 낮게 속삭여 보라. 앉은 자리에서 그 말의 위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는 당신과는 빼도 박도 못한다’는 의미가 됨으로써 아주 난처한 경지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역시 누가 뭐라도 영어의 ‘stuck’은 우리말의 ‘붙었다’가 주는 끈적한 암시의 충격을 도저히 쫓아가지 못한다.

 

© 서 량 2006.12.12
-- 뉴욕중앙일보 2006년 12월 13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