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사전은 ‘당신(當身)’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1 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하오’할 자리에 쓴다. 2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3 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4 ‘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
‘어머니 살아 생전에 당신께서…’ 의 '당신'은 4번 용법으로 제 3자를 지칭한다. 그러나 나머지 셋은 모두 이인칭 용법으로 의미상 서로 대단한 이질감을 풍기고 있다.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책 제목에서 ‘당신’은 1번에 해당한다. 차분하고 공식적인 어법이다. 2번에서처럼 여보, 당신 하는 말투는 부부간의 다정한 호칭이다.
그러나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중년 남자들이 시비가 붙었을 때 한쪽이 ‘당신 말 다했어?’ 하며 고함을 지르는 3번의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럴 때의 ‘당신’은 긴장감과 적개심이 넘치지 않는가.
어찌하여 백년해로를 약속한 배우자간의 호칭과 ‘맞서 싸울 때’ 하는 말이 같을 수 있는가.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다!
상대를 부를 때 너, 자네, 그대, 당신 말고도 귀하, 임자, 댁 같은 고풍스러운 호칭도 있다. ‘귀하는…’으로 시작되는 공문이나 ‘임자, 야심(夜深)한데 고만 자리에 듭시다’ 하는 사극 대사며 ‘댁(宅)은 뉘시오?’라는 옛날식 질문 또한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이상하도다! ‘당신’에서는 상대를 몸 취급 하더니만 이번엔 멀쩡한 사람을 집으로 보다니.
우리는 또 눈 앞에 사람만 얼씬하면 가족으로 착각한다. 설렁탕집 웨이트레스는 ‘언니’고 나이 든 술집여자는 ‘어머니’ 완벽한 타인을 ‘형님’ 혹은 ‘누님’이라 부른다. 깡패들끼리 시비가 붙었을 때는 형님이 아닌 ‘형씨’라 한다. 애인을 ‘오빠’라 하고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정황은 근친상간도 이만저만한 근친상간이 아니다.
양키들의 이인칭 대명사는 단순하게 ‘you’다. 8세기 경부터 쓰이기 시작해서 아직도 잔재가 남아 있는 고리타분한 단어 ‘thou, thy, thee(그대, 그대의, 그대에게)’를 제외하면 그들은 남녀노소, 직함의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를 철두철미하게 ‘you’라 부른다. 실로 단순 뻑적지근하지 않은가.
우리는 상대방 이름에 직함을 붙인다. 홍길동을 미스터 홍, 홍씨, 홍길동님으로도 부르지만 홍사장님, 홍팀장님, 홍병장이라 부른다. 서로 마음 놓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 굳이 직장 분위기를 불러 일으켜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이다.
양키들은 웬만하면 서로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른다. 그들은 여간하지 않고서는 이름 뒤에 직함을 붙이지 않는다. 양키들은 그만큼 친숙한 인간관계를 의도적으로 추구한다. 한 인간을 직장이나 사회적 위치에서처럼 기능적인 도구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중국과 일본의 침략으로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역사를 짊어진 우리는 대단한 집단의식에 빠져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양키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고수한다.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의식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 우리는 상대방의 직함을 불러서 거리감을 조성하는 반면에 양키들은 누구하고라도 퍼스트 네임 차원에서 지냄으로써 고독한 개인주의의 위안으로 삼는다.
매일을 아들, 손자, 며느리가 상머리에 오순도순 모여 앉는 우리 대가족 제도 전통과 뿔뿔이 흩어져 살던 식구들이 일년에 몇 번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에 불현듯 만나는 핵가족 위주의 양키들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 와서 이런 동서양의 이율배반적인 의식구조의 물결을 지금껏 헤쳐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서 량 2006.11.14
-- 뉴욕중앙일보 2006년 11월 15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39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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