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 지배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들

서 량 2007. 8. 21. 13:33

 

 

70년도 초반만 해도 담뱃불 좀 빌립시다, 할 때 ‘Do you have a light with you?’ 했다. 그런데 80년도쯤에는 ‘You got a light on you?’ 라는 표현을 자주 들었다. 요사이는 돈 좀 있어? 할 때도 ‘Do you have some money on you?’ 한다. 일대 일로 하는 정신상담도 ‘one to one therapy’라고 했든데 요사이는 ‘one on one therapy’라 한다. 어느 사이에 영어 구어체에서 ‘with’와 ‘to’가 ‘on’으로 대치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with’나 ‘to’의 동행의식이 ‘on’의 지배의식으로 바뀐 것이다.

 

‘on’ 하면 ‘There is a book on the desk’, 할 때처럼 무엇이 무엇 ‘위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머리 위에 돈을 얹어 놓고 다니지 않고서야 ‘Do you have some money on you?’ 라는 말은 우리들 입에서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 더더구나 ‘one on one therapy’라는 말은 정신과 의사가 사무실에서 환자를 올라타는 어색하고 망측한 연상작용이 떠 오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이어트 하는 것을 ‘on a diet’, 당직일 때는 ‘on call’, 걸어 가는 것을 ‘on foot’, 경계하는 것을 ‘on guard’, 얼음에 술 타는 것을 ‘on the rocks’, 시장에 집이나 물건이 나와 있는 것을 ‘on the market’, 무엇인가를 주문 해 놓았을 때는 ‘on order’, 세일 할 때는 ‘on sale’, 재판 중이면 ‘on trial’, 휴가 중이면 ‘on vacation’, 인터넷에 들어가는 것은 ‘online’, 전화 통화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on hold’, 기타 등등, 영어는 그저 입만 뻥끗 했다 하면 ‘on’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하다 못해 무엇에 대하여, 할 때도 ‘about’보다는 ‘on’을 우선적으로 쓴다. 이제는 ‘사랑에 관하여’를 ‘On love’라 하지 않고 ‘About love’라 하면 고리타분하게 들린다.

 

우리말의 ‘on’에 해당하는 표현에 윗 상자(字)의 상(上)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뜻이 무엇에 있어서 혹은 무엇에 관하여 라는 데 그치고 말지 영어처럼 다채롭게 쓰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형식상(上), 체면상(上), 관습상(上) 할 때 쓰는 ‘상’자 몇몇 밖에 더 이상 별다른 용법이 없다. 이런 말들은 한자라서 그런지 그 뉘앙스가 위선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소위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장유유서(長幼有序) 사상이 판을 치는 동양인들에게 형식상, 체면상 하는 말들의 윗 상자는 좀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미국인들이 ‘on’이라는 전치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들의 의식 속에 그만큼 지배욕이 넘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문자 그대로 ‘on top of the world’ 하면 ‘세상 꼭대기에’라는 말로서 기분이 최고로 좋다는 뜻. ‘on the make’ 하면 발전도상에 있다는 뜻이면서 남자건 여자건 이성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행동을 뜻하는 속어도 된다.

 

‘on’에는 지배의식이 충만하다. ‘위’와 ‘꼭대기’를 뜻하는 ‘on’을 자주 쓰면서 스스로의 지배적인 각도를 시시때때로 확인하는 미국인들이다. 이들 의식 속에는 인간과 사물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간에 넉살 좋게 작용하는 동물적 힘과 힘의 대결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자타가 공히 전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이 아닌가. 오늘도 이 넓은 땅 미합중국에는 이랴 낄낄! 하며 상대를 올라타고 휘둘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배광들이 자유분방하게 서식하고 있다.

 

© 서 량 2006.05.01

-- 뉴욕중앙일보 2006년 5월 3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