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9

여름 / 김정기

여름 김정기 닫힌다 잠구어진다 한땀씩 꿰매진다 막이 내린다 그래도 열고 돌리고 뜯고 창밖에 잣나무 우듬지를 꺾는다 구겨지며 오르는 막이 어설퍼도 무대는 황홀하다 들꽃들. 넝쿨도 열매도 자라고 떠나간 사람도 여름을 열러 닫혔던 고요를 딛고 현관을 연다 허공은 포효하고 헤매던 땅이 열린다 조금씩 여름이 떠나가고있다. © 김정기 2020.07.31

날개 / 김정기

날개 김정기 한 방울 피 남루한 내 옷자락에 떨어지니 옷깃 스치는 대로 산천초목 눈뜨고 이 빛나는 날개 2천 년도 넘게 지상을 덮었습니다. 무릎 꿇어도 용서 받지 못할 백합 위에 얼룩 지워내며 오랫동안 걸어온 뒤 돌아봅니다 당신의 부활은 한 기 봄 쑥이 드리운 그늘까지 손길을 뻗어 거두어 주시고 풀꽃 한 송이를 피워내기 위해서 새 날을 여셔서 허공을 딛고 하늘에 오르게 하는 날개입니다 세상파도 속에서 섬이 되어 있을 때는 가슴 열어 안아 주시는 날개 살아서 믿으면 죽지 아니하는 눈부신 날개 죽어도 사는 못 자국입니다 이제 다시 새로운 봄을 경험하게 하소서 -- 2011년 부활절에 © 김정기 2011.04.22

모래장미 / 김정기

모래 장미 김정기 골수에 단맛 다 빨리고 가슴에 꽂은 장미 사람들은 절하고 울음 울고 떠나지만 시선이 꽂히면 와르르 무너지는 꽃. 비단 자켓에 달았던 코사지 향기마저 갖추었네. 바위 결에 돋아난 그림 한 장 어두움은 언제나 당신 안에 스며들어 분명히 꽃이었던 자리에 피어나는 허공 물결을 잡으러 떠내려 왔던 개울가 자갈에서 꽃이 보이는 날 모래 장미를 달고 외출하면서 조금씩 더 수줍어하리 수집음이 슬픔이라 한들 당신이 나를 용서 할 수 있겠나 어머니 적삼에 달았던 꽃도 이제 보니 한 웅큼의 흰 모래였네 매운 무를 씹어 삼킬 때마다 꽃을 달아 주시던 모래 손. © 김정기 2010.10.12

겨울 담쟁이 / 김정기

겨울 담쟁이 김정기 땅을 박차고 시퍼렇게 얼어서 허공을 기어오른다. 잎 위에 눈이 쌓여도 녹을 때까지 답이 없다. 끝없는 질문의 문설주에서 속으로 뻗는 줄기를 억누르며 들키지 않게 속살을 키운다. 어둠이 그의 길을 막아도 태양을 만들어내는 몸짓으로 눈물도 없이 하루를 닫는다. 실핏줄에 동상이 걸려 얇은 살이 멍들어 번져가도 과묵하던 아버지의 품성 가지고 올라가고 오르고 또 오를 뿐이다. 작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혼자서 힘을 얻는 그는 숨결을 품고 창공에 집을 짓는다. 왕궁에 기왓장도 어루만지고 그보다는 빛나는 봄을 잡으려고. © 김정기 2010.01.12

|詩| 표범무늬 블레이크

저 플라스틱 연장통은 새 시대를 위한 詩的 장치 폭발직전의 페미니즘이야 연장통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십자 스크루드라이버를 능숙하게 조이면서 블레이크가 詩語를 바꾸고 있어요 플라스틱은 반 정도만 투명해, 끝내 블레이크는 동양철학 설파에 실패한다 호랑이 꼬리가 시계 방향으로 꽉 비틀어 조이는 그림의 詩想은 무언가 *Tyger Ty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 부처가 엄지와 검지로 그리는 ‘ㅁ’ 공간 위쪽 삐딱한 허공을 지적하는 표범무늬 저 세 번째 손가락은 무언가, 無言歌 속에 물음을 묻고 나를 쿨쿨 잠재우는 당신은 무언가 *신비주의자, 선지자로 불리는 영국 시인 William Blake (1757~1827)의 대표작 “The Tyger”의 첫 두 ..

발표된 詩 202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