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3

달 항아리 / 김종란

달 항아리 김종란 끝을 살짝 잡은 것 같은데 벌써 저녁 무렵 가볍게 한 잔을 마셨는데 꽃나무는 옹이가 지고 빗물 눈물 무늬가 어룽진다 스치듯 소매 끝자락 잡은 것 같은데 발은 닳아서 이미 경계에 가 닿아 있다 마루 끝에 잠시 앉았다가 목례를 하고 떠나든지 흰 도자기 그릇에 마음을 담고 잘 익은 술처럼 바라보며 약간 흔들어 보기도 하며 쓴 약처럼 두 눈을 감고 꿀꺽 삼키기도 하며 취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대 내가 아님을 © 김종란 2010.05.07

|詩| 간장에 비친 얼굴

날 맑은 가을날 장독대에 올라가 간장항아리에 얼굴을 집어넣으면 새까만 간장거울 속에 눈 흰자위가 분명치 않은 커다란 얼굴 열 살 짜리 얼굴 내 얼굴이 아닌 얼굴이 보인다 얼른 머리를 빼고 다시 보면 매운 고추와 숯 덩어리 몇 개 무작정 둥둥 떠 있는 간장항아리 속 간장거울 뒤쪽으로 은박지 하늘이 흔들린다 내 얼굴도 세모 네모 마름모꼴 사다리꼴로 일그러진다 크레용으로 북북 그린 그림 유년기 도화지 속 도깨비 얼굴 골이 잔뜩 난 도깨비 이마에 뿔이 크게 두 개 솟아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 간장항아리 안에서 끈질기게 파도가 친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파도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끝이 안쪽으로 하얗게 말리는 어떤 파도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 서 량 2004.10.23 2005년 4월호에 게재 ..

발표된 詩 2022.03.20

|詩| 지독한 에코

뚜껑을 덜거덕 열고 장독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푹 박고 들여다보면 내 사랑을 둥그렇게 구획하는 경계 안의 컴컴한 내막이 아우성치는 무시무시한 에코가 얼굴을 때린다 정신이 얼얼해지고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금방 지나간 듯 귀가 멍멍해지는 에코! 지구가 암흑 속에서 꿈틀대는 격렬한 동작 값싼 교훈 같은 거를 들먹이는 고대소설의 권선징악 마음 착한 남녀가 막판까지 살아 남는 사연 그리고 또 있다 시인들은 너 나 다 아름답다는 망상 등등 하여튼 간에 빈 항아리 속에서 아! 하는 지독한 에코 때문에 지성이고 쥐뿔이고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아늑한 이기심이 솟는다 아무 것도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항아리에 곰곰이 귀를 기울이다가 © 서 량 2005.12.28 2006년 12월호에 게재 시작 노트..

발표된 詩 202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