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 6

|詩| 겨울 아침

어제를 잊듯 커튼을 열어 제친다 함박눈 속 깊이 더러운 마음으로 죽은 사람들이 켜켜이 파묻혀 있구나 몸이 거무죽죽한 어미 사슴이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꼬리를 사르르 떤다 어미가 연신 고갯짓을 하니까 새끼들이 눈을 얼굴에 문지르며 세수를 하는 거 있지 한 놈이 머리를 들어 내 방 안을 들여다본다 바람결 시린 귀를 뒤로 제치고 부르르 떤다 그놈이 더럽게 살아있는 내 마음을 차근차근 뜯어보다가 한참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난 듯 눈 덮인 언덕 쪽으로 갑자기 겅중겅중 뛰어가는 거 있지 시작 노트: 눈 내린 아침에 사슴을 마주하리라는 예측을 전혀 못했지. 사슴과 나는 서로가 살아있다는 걸 기쁘게 확인한다. 에미 사슴도 새끼 사슴도 꼬리를 사르르 떨거나 몸을 부르르 떨더라. 고갯짓도 하고 겅중겅중 뛰기도 하던데. 나..

발표된 詩 2023.01.02

깊은 겨울 눈 이야기 / 김종란

깊은 겨울 눈 이야기 김종란 눈은 온다 모든 올 수 없는 것 만날 수 없는 것 위하여 눈은 와서 펑펑 내린다 갑자기 멀리서부터 잿빛으로 어두어지다가 불현듯 화안하게 온다 누군가 몰래 악기를 연주해 주듯 살쾡이처럼 뛰어드는 재앙의 상흔도 점점이 사라져가는 숨은 음악 두 눈을 가리는 아가의 손처럼 말랑말랑하게 다가와 나의 폐허를 가려준다 흰 손가락으로 검은 웅덩이를 지우고 붉은 눈동자를 지우고 해어진 여행가방을 지운다 뭐 더 없어 하면서 코끝이 시리게 웃는다 힘들게 있는 것들을 그저 하얗게 덮은 후 서늘한 몸짓으로 따뜻한 뺨에 다가와 녹는다 이미 없었던 것을 대변하듯 시리게 다가와 사라진다 함박눈은 헐벗은 것들을 사랑한다 가장 야윈 것 위에 더 포근하게 쌓인다 사라지는 것 볼 수 없는 것들을 조곤조곤 이야기..

|詩| 와사비 푸른 콩

짙은 녹색이 청색에 가깝다 함박눈이 아무 때나 펑펑 쏟아진다 기약도 없이 새벽 4시에 간식을 먹는다 밖에서 무슨 일이 터지는지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아도 돼 자폐증의 즐거움과 짙푸른 녹색이 서로 결이 잘 맞아요 앞서 말했듯이 꼭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눈 시린 실내에 온통 오렌지 계통의 빛이 넘쳐나고 있어요 어찌 생각하면 속이 쓰릴 만도 하지 약손가락 손톱보다 좀 작은 크기 푸른 콩들이 막 뛰어다니네요 등을 잔뜩 꼬부린 태아 모습들 등을 잔뜩 꼬부린 생선 모습들 나는 어느새 와사비와 호흡이 척척 맞는다 ©서 량 2020.11.27

2020.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