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6

|詩| 시계바늘이 그토록

낮 12시 10분 전쯤을 한 쪽 팔 길게 뻗쳐 버티는 시계바늘 장침이 보여주는 힘 한겨울 분홍 국화 한 송이 빛이 관통하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시계바늘이 이루는 *arpeggio 잔 파동 산지사방으로 물결치는 은하수 은싸라기 잿빛 지구 위 낮 12시 10분 전쯤에 밤 10시, 11시를 알리는 괘종소리 뎅뎅 울리네 한겨울 바람결 싸락눈이 우리는 왜, 우리는 왜, 하며 나직하게 창문을 때리는 대낮에 *아르페지오 - 분산화음, 화음을 빨리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주법 시작 노트: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눈은 입춘이 지난 지열 때문인지 서재 옆 드라이브웨이에 내리자마자 이내 녹거나 바람에 날려서 아스팔트를 덮지 못한다. 국화 한 송이 꽃잎 하나하나가 싸락눈으로 둔갑한다. 국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낮인지 밤..

2023.02.22

집이 말한다 / 김정기

집이 말한다 김정기 누런 개 한 마리 눈에 넣고 부서져 내리는 은하수를 지붕에 주어 담는다. 담장 너머로 몰래 훔쳐보는 카이오라는 수놈은 아일랜드 사람이 주인이지만 우리가 던져주는 햄 조각에 반하여 우리 집에 낯선 기척이 있으면 짖어 댄다. 순한 눈매를 갖은 그는 희미해지는 나를 데리고 낯선 바다를 건너가려고 한다. 우리 집이 말한다. 그가 건너는 대서양을 따라가면 조국이 더 멀어진다고. 유혹의 팔소매를 뿌리치고 혈혈단신 아픈 다리를 끌고 가지만 고향산천은 멀기만 하다. 뜰에 무궁화, 봉선화, 꽈리를 키우고 정선아리랑을 들으며 여기서 세월을 삭히라고. 집이 말한다. 뉴욕에서 젖은 몸 말리고 무엇이든 서툰 대로 버티면 누명도 벗어진다고. 30년을 살아온 잉글리시 투더형 우리 집이 말한다. 방에 달린 문들도..

|詩| 가을의 난동

심지어 캄캄한 우주 깨알만한 은하수까지 움켜쥐는 엄청난 기력입니다 떡갈나무들이 허리 굽혀 옷을 벗는다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추억, 추억 전신이 땅거미 저녁 빛, 오렌지색 황혼 빛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몸부림, 몸부림이 목숨을 거는 모습이다 슬픈 기색이 없이 눈물 따위 글썽이지 않으면서 심지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깁니다 시작 노트: 옛날에 써 두었던 시를 혼쭐나게 많이 뜯어고쳤다. 시를 쓰다 보면 그저 만만한 게 계절을 주제로 삼는 짓이다. 특히 봄이나 가을을 우려먹는다. 전에 이라는 시를 쓴적이 있다. 이번에는 이다. 맞다, 맞다. 계절은 내게 반란을 이르키고 난동을 부린다. 그런 어려움을 섭렵하겠다고 덤벼드는 나도 참, 나다. © 서 량 2008.10.14 – 2022.11.17

2022.11.17

|詩| 산개구리

산에 하늘에 산개구리 산다 내 작은창자에 개굴개굴 산개구리 산다 바위틈 별똥별 날름날름 핥아 먹는 산개구리 여드름 하나 없는 간난아기 볼기짝인냥 뱃가죽 살결 야들야들한 산개구리를 보아라 은하수 건너 후다닥 툭툭 점프하는 저 산개구리를 보아라 툭 튀어나온 눈알 속 깊은 곳에서 새벽 이슬 부르르 훌훌 털고 내 뮤즈를 슬쩍슬쩍 부추기는 산개구리, 아까부터 앞뒤 다 제쳐놓고 중뿔나게 울어 대는 개굴개굴 산개구리, 나는 시방 산개구리다 시작 노트: 20년 전에 쓴 시를 한두 군데 뜯어고쳤다. 내용을 바꾸려 해도 바꾸지 못하겠다. 나는 변한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심하면서도 또 한편 재미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말투가 직설적이 됐다는 점. 그래서 좀 걱정이지. 가을이면 가을마다 개굴개굴 울어대는 산개구리를..

2022.09.29

|詩| 새벽 냄새

새벽에서 꽃 냄새가 난다 이상한 꽃 냄새 오후쯤에야 겨우 사라질까 말까 하는 뭇 별 냄새 내 쪽으로 오고 싶어 안달하는 은하수 냄새 얼추 회색인가 싶었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내 대뇌피질을 연신 건드리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산뜻한 빛의 율동 오래 전 음력설에 맡았던 영락없는 당신 색동저고리 냄새 © 서 량 2006.08.10 - 2021.08.16 (수정) 원본 - 세 번째 시집 (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발표된 詩 202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