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3

|詩| 여우비 내리는 날

여우비가 내렸다 짙은 안개가 경마장 함성처럼 질주하면서 내 차를 스치면서 험준한 계곡을 빠지면서 여우비가 쏟아지는 거 앞서거니 뒤서거니 파크웨이를 달리는 용모 어슷비슷한 승용차들이 제각각 무슨 굉장한 철학서적을 읽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요 앞차가 깜박이를 키네 나도 깜박이를 켰지 분명한 이유가 없었어 여우와 호랑이는 그렇게 비 내리는 날 시집 장가를 갔다 청명한 날이면 날마다 그냥 누워 잠만 쿨쿨 자는 종족보존 본능이라니 여우비를 맞으며 나는 슬며시 사라지고 얼굴이 대충 당신을 닮은 내 종족이 살아 남으리라는 생각이 솟았다 불쑥 © 서 량 2007.03.03 세 번째 시집 (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발표된 詩 2021.06.08

|詩| 여우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다가 열 살 때 여름방학에 아버지에게 끌려간 본적지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홀로 초가집에서 사시던 시골에서 어느 날 산에 혼자 올랐다가 확실히 알았어 사람이 죽었다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하는 거 키 작은 소나무들 새살거리는 산언덕에 허연 광목천막을 쳐 놓고 어른들이 웅성웅성 막걸리를 마시다가 나한테 떡 몇 개를 줬다 나는 허기진 강아지처럼 맛있게 떡을 먹다가 뭔가 이상하더라 어렴풋하게 이제야 기억 나네 몇몇 얼굴이 수척한 남자들이 삼베 옷을 입고 있었던 거 천국과 지옥을 구슬피 맴도는 구름 몇 점 빼 놓고 그날 하늘이 참 맑았는데 갑자기 가냘픈 빗방울 질질 쏟아졌어 누군가 꿈결처럼 “여우비가 내리네!” 했다 그때 나는 화려한 꼬리치마를 입은 여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살결이 ..

200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