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6

|詩| 시계바늘이 그토록

낮 12시 10분 전쯤을 한 쪽 팔 길게 뻗쳐 버티는 시계바늘 장침이 보여주는 힘 한겨울 분홍 국화 한 송이 빛이 관통하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시계바늘이 이루는 *arpeggio 잔 파동 산지사방으로 물결치는 은하수 은싸라기 잿빛 지구 위 낮 12시 10분 전쯤에 밤 10시, 11시를 알리는 괘종소리 뎅뎅 울리네 한겨울 바람결 싸락눈이 우리는 왜, 우리는 왜, 하며 나직하게 창문을 때리는 대낮에 *아르페지오 - 분산화음, 화음을 빨리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주법 시작 노트: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눈은 입춘이 지난 지열 때문인지 서재 옆 드라이브웨이에 내리자마자 이내 녹거나 바람에 날려서 아스팔트를 덮지 못한다. 국화 한 송이 꽃잎 하나하나가 싸락눈으로 둔갑한다. 국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낮인지 밤..

2023.02.22

흰 토끼 이야기 / 김종란

흰 토끼 이야기 김종란 흰 토끼를 만났지 토끼를 품에 안고 들판을 걸었어 끝없는 여름 건너편으로 토끼를 놓아준다 나도 모르게 나는 한 마리 토끼, 세상이 온통 흰 구름으로 덮여 있네 토끼가 아닌 것이 없어 세상에 시계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 나무의 키가 자라는 속도를 기록한다 눈금을 새겨 놓으려 해 세심하게 흰 토끼 순간, 시간을 뛰어넘어 들판 밖으로 사라졌어 © 김종란 2021.07.01

의자와 시계 고양이 / 김종란

의자와 시계 고양이 김종란 시간과 시간 사이에 놓여있다 흐름이란 다른 공간으로 사뿐히 뛰어넘는 것 깜빡 살아나는 빛을 감지한다 동공 깊숙이 세계와 나 고풍의 유리창은 예의 바르게 닦여 있다 침묵의 구름 노회(老獪)한 나무 곁 없는 듯이 머문다 소리를 너에게 건넨다 사람 가득 차 붉은 무리의 빛이 시야의 끝에서 잠시 흔들리듯 의자에 앉아 초침 소리를 바라본다 빛은 깜빡 진다 © 김종란 2009.09.09

|컬럼| 387. 세 개의 시계

“I have two watches. I always have two. One is on my wrist and the other one is in my head. It’s always been that way. - 나는 시계가 둘이야. 늘 둘이 있어. 하나는 손목에 하나는 머리 속에 있지. 항상 그래 왔어.” 2021년 2월에 개봉된 앤서니 홉킨스 주연 ‘The Father’에 나오는 앤서니가 하는 말이다. 왠지 애처롭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실재하는 손목시계와 머리 속에서 망가지고 있는 시간개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치매환자의 극중 이름도 앤서니다. 한국에서도 4월 초에 개봉된 영화다. 고심 끝에 타이틀을 ‘아버지’라 번역하지 않고 그냥 ‘더 파더’라 옮긴 것이 흥미롭다. 84살의 앤서니 홉킨스의 소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