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 4

봄, 비행일지 / 김종란

봄, 비행일지 김종란 비상 착륙한 오지에서 오렌지 몇 알 패랭이 꽃 몇 송이 물 한 컵 루소의 고백록 빈터에 적어 본다 울렁이고 헛헛하다 (이 어지러움을 잠 재울 한마디 말을 기다린다) 눈을 감고 옷깃을 여민다 찻잔에 소용돌이 치던 바람 낯선 바람소리에 입술을 댄다 바람의 기억으로 비행의 속도를 더듬는다 몰두하던 풍경이 조각조각 흘러내려 유리 파편에 스며든다 반짝임을 손끝으로 민다 그 작은 유리문 뒤 배회하던 먼 길 베고 누웠던 길 고양이 한 마리 화들짝 감았던 눈을 뜬다 허기지고 눈부시다 봄은 가벼이 날아가 남겨진 것은 무거워 허기지고 눈부시다 먼 길을 다시 걸어 가야 한다 (한 마디 말을 붙잡는다) © 김종란 2014.04.03

비수 2 / 김종란

비수 2 김종란 몸을 청량한 하늘이 베어 버린다 무심코 손끝 베듯 아득하게 두 동강이 진다 구월의 바람 쏟아져 들어 온다 아이스크림 차 곁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푸르게 심장을 베인다 그늘에 핀 흰 수국 바람에 서로 어긋나듯 기우뚱 9월의 바람이 불면 내가 아니어도 네가 아니어도 된다 단칼에 베어져 일년초 지듯 살결로 감싼 푸른 핏줄과 붉은 심장 무거운 내장을 오늘은 버려도 된다 하늘만 가득히 들어와라 푸르게 푸르게 섬광처럼 베어져서 멀어지자 바다에 떠있는 흰 유람선처럼 오늘은 있어라 © 김종란 2011.09.19

성냥개비 집 / 김종란

성냥개비 집 김종란 내 손안에 드는 집 눈이 내린다 몇 송이 눈에 휘청인다 새끼 손가락으로 대들보를 받쳐준다 무너지더라도 눈이 펑펑 내렸으면 협궤열차가 달려와 눈의 마을에서 조그많고 반질반질한 탁자위로 달려와 미끄러질 듯 덜컹거리며 멈춘다 기다림의 집 모든 작은 것은 서로를 떠받치며 균형을 잃어 밀리며 뒤로 벌러덩 자빠져도 소리가 없다 눈이 속마음에서부터 펑펑 쏟아져 눈사태를 이루면 창문의 얼룩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 본다 폭설의 집 무너져 내리며 부딪히며 잠시 나르기도 하는 집 가벼웁고 쉬이 사라지는 눈이 내리면 폭설이 내리면 불의 기호들이 모여 춤추는 집 눈 속에 파묻혀도 뜨거운 집 © 김종란 2010.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