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8

|詩| 엄지 손가락

엄지 손가락 -- 마티스 그림 “검은 배경의 책 읽는 사람”에게 (1918) 머리에 사과 하나 복숭아 하나 잎새 잎새 몇 개 실내는 오후 무더운 실내 책은 어디를 펼치나 백지 백지 새하얀 백지 여자가 눈을 비스듬히 아래로 깔고 생각을 멈추네 책갈피 사이에 놓이는 오른손 엄지 가벼운 엄지 詩作 노트: 책을 읽는 것도 책을 읽다가 잠시 책 읽기를 중단하는 것도 동작이다. 둘 다 동작이다. © 서 량 2023.07.07

빨간 사과 / 김종란

빨간 사과 -- 시리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고 가신 소설가 김지원님께 김종란 녹음 우거진 공원으로 검고 긴 머리 휘 날리며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녀의 눈은 풍성한 머리 바로 밑에서 꿈꾸고 문자는 두 손에 가슴에 춤추는데 스무 살의 그녀는 갔다 시린 손으로 따뜻한 가슴을 안으며 바람 부는 곳으로 있지 않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남겨 놓았다 그녀는 언제나 스무 살이다 백 년의 베개머리에서 미리 온 가을 햇살처럼 환하다 백발이 무성 하여도 그 가을 햇살에 찍힌 세상은 한 입 베어 무는 빨간 사과 시어서 눈물 맺히며 웃음 환하다 © 김종란 2013.02.05

|컬럼| 428. 사과를 하라니!

종종 병동에서 환자들이 치고 박고 싸운다. 보조간호사들이 덤벼들어 뜯어말린다. 아직 감정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 둘을 인터뷰한다. 누가 먼저 때렸냐? - “Who started it?” 이 질문은 병동환자들, 당신과 나같이 멋모르는 보통사람, 그리고 조석으로 뉴스를 제조해서 상대 정당에게 시비를 거는 정치인들이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이다. 둘은 평소에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관계다. 한쪽은 감성적이고 다른 쪽은 이론에 밝지만 화제를 바꿔가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능력이 딸린다. 사태의 발단은 얌전한 이론파보다 대체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사나운 감성파에 있다. – “HE did!” 사과(謝過) 받기를 좋아하는 감성파가 이론파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이론파는 사과를 할 이유가 없지만 반대파의 압력을 이기지 못..

|詩| 사과를 위한 터무니없는 변명

사과를 탓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일일 거다 한입 맛본 후 덤벼들어 더 깨물어 먹고 싶은 새빨간 사과가 자타가 공인하는 내 삶의 과녁일망정// 사과는 내 무모한 사랑을 독차지한다// 황망한 시련의 끝머리에서 사과가 세차게 흔들린다 미련을 버려라 미련을 버리거라// 나는 사과를 욕보인다 앞뒤관계가 맞지 않는 순간에 설익은 논리의 틀을 홀랑 벗어 던지고 전혀 예기치 못한 자세를 취하면서 톡톡히 반항을 할지언정 © 서 량 2011.06.12 – 2021.04.08

2021.04.08

|컬럼| 234. 감나무 밑에 누워서

‘apple’은 17세기까지만 해도 딸기 종류를 제외한 모든 과일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스펠링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고대영어로는 대추를 ‘손가락 사과 (finger-apple)’라 했고 바나나를 ‘낙원의 사과 (apple of paradise)’, 그리고 오이를 ‘땅 사과 (earth-apple)’라 일컬었다. 구약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가 실제로 무슨 과일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포도, 무화과, 석류, 심지어 버섯이라 추측하지만 어원학적으로 ‘낙원의 사과’라 불렸던 바나나를 내세우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를 내가 정신과 의사답게 유추하면,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 조심스레 바나나를 입으로 가져가는 장면이 다분히 외설스러운 연상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적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