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78. 혼동

서 량 2024. 10. 15. 09:00

어릴 적에 혼동과 혼돈의 뜻이 곧잘 헷갈렸다. 서로 발음이 비슷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좀 그렇다.

 

네이버 사전은 ‘혼동(섞을 混, 같은 同)’을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보거나 생각함’, 그리고 ‘혼돈(섞을 혼, 막힐 沌)을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이라 풀이한다. 영어로 혼동은 ‘confusion’. 혼돈은 ‘chaos’. 이 두 말은 발음이 서로 생판 다르기 때문에 뜻이 섞갈리지 않는다.

 

요컨대 혼동과 혼돈은 뒤섞거나 뒤섞이는 것이 문제다. 불고기, 상추, 고추장, 등등을 숟가락으로 뒤섞어 비벼먹는 비빔밥은 별로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비빔밥 먹는 식으로 하는 사람은 생각이 부실하다는 말을 듣는다.

 

오늘 그룹세션 타이틀은 ‘confusion, 혼동’이라고 하니까 다니엘이 다짜고짜 ‘Confucious! 공자!’라 소리친다. 말의 발음이 비슷해서 그러는구나! 하고 친절한 해석을 내리며 공자에 대하여 아는 걸 말해보라고 격려한다. 그는 공자가 오래전 일본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자가 청각적 혼동이라면 공자를 일본인 취급하는 것은 시각적 혼동이 아닐까.

 

난생 처음 미국에 와서 미국인들 얼굴이 비슷하게 보여 헷갈리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는 유사한 것들을 한 통속으로 취급하는 경향에 시달린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얼핏 보기에 자라의 딱딱하고 거무티티한 등딱지가 시커먼 가마솥 뚜껑과 닮았기 때문이다. 아들이 네 살 때 비행장에서 내 남동생을 나로 착각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정신과에서 자주 거론되는 ‘transference, 전이, 轉移’ 현상은 쉽게 말해서 어릴 적 경험했던 감정이 지금의 나를 지배하는 정황이다. 당신과 나는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며 산다. 현재 속에 과거라는 유령이 늘 숨어있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confusion’에는 고대 불어로 ‘혼동’은 물론 ‘장애, 부끄러움’이라는 뜻도 있었고 당시 라틴어의 ‘섞다, 혼합하다’라는 뜻을 직수입한 말이었다 한다. 피동사형으로 써서 ‘confused, 어리둥절해하는, 혼란스러워하는’, 하면 난처한 상황, 즉 쪽팔리는 시추에이션이 연출된다.

 

‘chaos’는 완전히 다른 사연을 지닌 말로서, 14세기경 희랍어와 라틴어에서 ‘심연, 또는 광활한 공허, 공백’을 뜻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엉망진창의 혼동’이라는 뜻도 생겨났다 한다. 구약 창세기에, “창조가 시작되는 혼동스럽고 형체가 없는 우주의 기본 상태” (1530년 출간 영어 버전)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말이기도 하다. 1977년에 수학에 대두한 혼돈설(混沌說, Chaos Theory)이 있다. 나는 상세한 내막을 모르면서도 이 학설을 생각하면 은근히 마음이 설렌다.

 

우리는 ‘이것은 저것이다’, ‘A=B’라는 수학공식을 내세운다. ‘A’라는 독립개체가 ‘B’와 동일하다니. 아무리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부부일심동체(夫婦一心同體), 하는 중국식 사고방식이 만연하는 우리의 성향이라지만. 아무리 눈앞에 의미심장한 사람이 출현하는 순간에 바운더리 의식이 귀신처럼 사라지는 우리의 기질이라지만.

 

‘군사부3체’, ‘부부2심2체’라고 21세기 식으로 말하고 싶은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절대절명의 위기감각에서 ‘A=B=C=…’ 하는 공식을 내세우는 사이에 어느덧 세상이 알파벳 수프로 파도치는 거대한 혼돈의 바다가 되는 사태를 두려워하면서.

 

ⓒ 서 량 20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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