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32. 섶나무와 쓸개

서 량 2023. 1. 11. 21:00

 

어릴 적 배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사자성어를 생각한다. ‘정신상담’과 첫소리만 빼면 발음이 똑같고 뼈에 사무친 내 직업의식 때문인지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말이다.

 

대학입시 공부할 때 교감 선생이 멋모르는 우리들에게 와신상담해서 꼭 좋은 대학에 붙으라고 언성을 높여 당부하던 말. 쓸개의 쓴 맛이 입안에 느껴지는 말. 이빨을 득득 갈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노력해서 어떤 일을 성취한다는 뜻으로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말. 그 이상한 말의 내막을 공부한다.

 

때는 바야흐로 기원전 3,4세기 춘추전국시대다. 오(吳)나라 왕이 월(越)나라와의 전쟁에 패배하고 전사한다. 아들이 원통해 하며 삐쭉삐쭉한 섶나무를 매일 밤 깔고 자는 아픔으로 아버지를 위한 복수를 다짐한다.

 

아들은 얼마 후 전쟁에 이겨 월나라 왕을 굴복시키지만 양국 신하들의 꾀임에 빠져 그의 목숨만은 살려준다. 월나라 왕은 그 굴욕감을 잊지 않으려고 매일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다시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섶나무를 침대로 삼았던 오나라 왕을 자살하게 만든다.

 

나는 훌륭한 학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와신상담에 나오는 옛날 중국사람이 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입때껏 살아왔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둘이다. 그들은 복수의 화신, 집념의 사나이들이었다. 아픔과 굴욕이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스스로를 ‘알파 메일’이라 칭하면서 툭하면 다른 환자들과 주먹다툼을 하는 병동환자 리처드는 자기가 고등학교 때 권투 선수였다고 자랑한다. 그때 남들에게 많이 맞았다며 어두운 표정으로 실토한다. 그래서 복수하는 마음에서 너는 지금 40이 넘은 나이에 맨날 남들을 때리고 싶어하느냐? 그는 고개를 떨구며 그렇다고 말한다. 생각이 다른 데로 번지지만, 아, 이놈도 그동안 와신상담을 해 왔구나. 내 생각이 틀렸나.

 

이상한 게 있다. 옛날 중국 오나라, 월나라 왕들은 그들 복수의 대상과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서도, 리처드는 왜 아무런 죄도 없고 관련도 없는 애먼 남들에게 복수하려고 덤벼드는가.

 

대답은 뜻밖으로 단순하다. 리처드 뿐만 아니라 대체로 우리 모두는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모욕을 당한 자리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못하고 다른 곳에 가서 화를 내다니.

 

노갑이을(怒甲移乙), ‘갑에게 당한 노여움을 을에게 옮긴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어디가 종로인지 어디가 한강인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잘 분별하지 못한다.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고생한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 노릇한다’는 속담도 ‘노갑이을’의 좋은 예다.

 

우리 정신세계의 비주얼이 고화질, ‘High Definition’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상황판단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이유로 숱한 오류를 범하는 우리들. 얻어맞는 것이 싫어서 권투부에 가입했던 리처드가 그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병동을 복싱 링으로 착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revenge, 복수’는 원래 14세기 라틴어로 권리를 주장하거나 벌을 준다는 뜻이었다.

 

전쟁에 시달린 사람들이 와신상담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집단현상이 일어난다.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중국이며 오랜 세월을 실향민(diaspora)으로 사는 유대인들이 그런 경우라 할 수 있겠지. 육이오 후에 일어난 ‘한강의 기적’ 또한 그런 메커니즘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종로에서 뺨 맞고 미국에 와서 웃음짓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서 량 2023.01.08

뉴욕 중앙일보 2023년 1월 11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제재

https://news.koreadaily.com/2023/01/10/society/opinion/20230110173004113.html

 

[잠망경] 섶나무와 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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